모임에서 배운 것

영화 감상과 글쓰기에 관하여

by 이파리


전공 서적을 같이 읽는 스터디를 제외하고 독서 모임에 가본 적은 없다. 나에게 책이란 주로 누워서 읽는 것이고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시공간이다. 그런 독서와 모임의 결합은 나에게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편한 사교나 대화의 장이라고 하더라도 단정히 차려입고 시간에 맞춰 어딘가에 가고 (아니면 컴퓨터를 켜고 회의실에 입장하고), 내 감상을 정리해서 발표하고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듣는 일 모두 사회적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수행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독서 모임의 맛을 몰라서 그렇지 몇 번 해보면 예찬자가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내키지 않는다. 그런 내가 영화 <태풍클럽>을 각자 보고 쓴 글을 나누는 모임 공지를 보고 처음으로 신청을 해 보았다. 영화는 극장을 나오면서부터 감상을 나누곤 해서였을까? 어제가 모임 날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수만큼, 아니 거기에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겨난 시너지까지 더해져 영화를 더 촘촘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이 놓쳤던 아기 울음소리를 누군가 기억했다. 그로 인해 한 캐릭터를 완전히 다르게 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의가 일었다. 각자의 관점으로 읽어낸 철학적, 사회적, 심리적 해석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동안 영화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다양한 관점을 접하니 영화가 더 입체적으로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배우고, 감독이 던진 철학적 질문에 대한 여러 해석을 들을 수 있어 흥미로웠다. 듣다 보니 만약 그림이나 음악을 하는 예술가가 있었다면 미학의 관점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연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태풍 장면 촬영에 대한 현실적 고충을 들었을지도.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논의가 더 다채로워지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주 가겠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장시간 듣는 게 에너지가 많이 들어 힘들었다. 생각한 대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혼자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본 좁은 하늘인 게 맞다. 그렇다고 번번이 우물 밖으로 뛰어올라 넓은 하늘을 봐야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우물 안에 있다는 걸, 보이는 저 하늘은 일부분이고 하늘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된 점도 있었다. ‘나는 명사를 잘 쓰지 못하는구나.’ 잘 썼다고 느껴진 감상문은 정확한 명사를 사용하고 꼼꼼히 짚어낸 글이었다. 그와 달리 나는 마음 따라 느껴지는 대로, 상세히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글을 썼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하고 명확히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글에서도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이거라고도 할 수 있고 저거라고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나 모호한 경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흐리멍덩하다고도 할 수 있고 유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나의 특성이다.


첫 번째 100일 글쓰기 때까지만 해도 남이 잘 쓴 글을 보면 '이런 걸 보완해서 나도 저런 글을 써야지' 생각하곤 했다. 부럽고 아쉬웠다. 어제는 ‘저분은 저런 글을 잘 쓰는구나. 내가 쓰는 글과는 다르구나. 나는 내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연습을 해야지’ 생각했다. 내 반응이 달라진 걸 보고 그새 조금 자랐나 싶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물론 어휘는(명사는 특히) 더 익혀야 한다. 명료하고 단정한 글을 쓰는 연습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내 글의 중심에 있어서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기보다는 ‘최선의 버전의 나’를 지향하는 게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글일지 모르지만 억지로 애써 본들 소용없을 것 같다. 누군가는 나의 정서에 공명하겠지, 소수라고 하더라도.


적확하고 이성적인 명사형 글쓰기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주관적이 경험과 감성으로 더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정서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글을 써야지. 편안하게 유영하는, 물처럼 흐르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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