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

해질녘 산책

by 이파리


집 근처 공원은 서울숲이나 올림픽 공원만큼 크지는 않지만 혼란하지 않은 정도의 알맞은 다양성을 갖췄다. 텃밭도 있고 킥보드랑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매끈한 중앙 광장도 있고 한쪽에는 가 본적은 없지만 전통 혼례식장도 있다.

땅 고르고 씨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텃밭에 옥수수는 벌써 내 키를 훌쩍 넘었다. 방울토마토랑 고추도 어깨만큼 올라왔다. 상추, 오이, 호박, 시금치, 가지, 바질도 키는 작지만 자라나는 기세는 옥수수 못지않다. 쑥쑥 자라는 농작물 사이를 걸으면 씩씩해지는 기분이 든다. 무성한 작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이 내 몸에 실시간으로 배어 드는 느낌이랄까.


이 텃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농약비료비닐 없는 3無 친환경 농법 되시겠다. 청년들의 정신건강을 돕기 위한 ‘청년 힐링팜’도 운영 중이다. 청년들이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는 프로그램으로 흙도 만지고 음식도 같이 해 먹으며 마음을 쉬어 가라는 취지라고 한다. 분양은 무작위 추첨 방식인데 인기가 많은지 빈자리 없이 모든 구획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하나같이 정성스레 잘 관리되어 있다.

어린이집 팻말도 여럿 보인다. 농사일은 선생님 몫이겠지만 채소 사이사이 쭈그리고 앉아 삐약삐약 선생님을 찾아 대던 낮에 본 아이들 모습은 귀여움 한도 초과였다. 지금은 아이들도 채소들도 잠잘 시간이다. 자원봉사자들에게 할당된 구역도 있다. 수확물로 저소득 가정에 김치나 밑반찬을 제공하기도 한다니 고운 땀 덕분에 농사도 잘되고 나도 갈 때마다 좋은 기운을 느끼나 보다.

건강한 우리 구민들은 더 건강해지려고 중앙 광장을 크게 둘러 열심히 뛰고 있다. 초여름에 왔던 간이 수국 정원은 철거됐고, 광장 가운데 어린이 물놀이장 준비가 한창이다. 한 달간 무료로 운영되는 시설로 초등학생 이하만 누릴 수 있다. 빨간색 간이 천막과 노랑 파랑 알록달록 초대형 튜브 수영장이 공원에 생기를 더한다.


공원 한쪽에는 야외 평상 위에 선 리더의 박력 있는 구령과 신나는 대중 가요에 맞춰 춤인지 체조인지를 하는 무리가 있다. 매일 이 시간에 오면 볼 수 있는 공원의 씬스틸러다. 오늘은 유독 인원이 많아 보여 더 파워풀해 보인다. 내가 뽑은 이 공원의 숨은 마스코트다. 어르신들은 무심히 지나치지만, 젊은 사람들은 체조단(?)의 마력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곤 한다. 오와 열을 맞춘 대형 근처에서 곧 뛰어들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흔들고 있는 리트리버 같은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시간대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공원은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은 평소에 잘 가보지 않았던 구석으로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소설가들이 봤다면 기묘한 스토리를 떠올렸을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라 한참을 서서 보다가 왔다. 해가 지고 빛이 사그라드는 시간.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 짧은 시간 동안에만 받을 수 있는 선물 같은 광경이었다.


팔색조 같은 여름날의 저녁 공원.

누군가에게는 홀로 터덜터덜 지나는 퇴근길이고, 다른 이에게는 혈당 스파이크 관리 혹은 친구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접선 장소. 그럴 의도 없이 공원을 이용하고 지나치는 모두가 여름 공원의 풍경을 다채롭게 꾸며주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제 주문한 <정원의 쓸모>가 현관 앞에서 다소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김금희 작가의 식물 에세이에 나온 책이었다. "워즈워드를 사랑하고 프로이트를 연구하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 치료사". 내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작가 소개였다. 정원과는 거리가 먼 삶이지만 "흙 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지다"라는 표지 문구가 나의 힐링 스팟인 우리 동네 공원과 텃밭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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