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충렬 지음, 유리창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에 흠뻑 빠져 읽었다. 수화 김환기. 환기 미술관에 가본 적이 있긴 하지만 자고로 아는 게 없을수록 편견과 선입견이 많은 법. 그에 대해 많은 선입견이 있었고, 이 책을 읽고 깼다. 타고난 천재라거나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인물이라거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부잣집 도련님. 서울대 미대 교수, 홍대 미대 학장, 굵직한 미전 심사위원 자리도 맡은 사람이니 고생이라곤 모르고 멋진 아틀리에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며 산 줄 알았다. 신문에 기사도 나고 좋은 평가를 받고 전시회가 문전성시를 이뤄도 그림은 하나도 팔리지 않아 먹고살 돈이 없는 속사정까지는 몰랐으니까.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 번뜩 떠오른 악상을 악보에 마구 그리는 모차르트가 있다. 김환기는 영감이 무시로 찾아와 주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림을 시작한 스무 살 일본 유학 초기부터 학교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열정적으로 찾아가 배우고 실력을 닦는 청년이었다. 돈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릴 때도(인생 대부분의 시간이다.), 피난 시절 쪽방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타향살이 시절에도, 그리고 말년에 몸이 아플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작업하는 성실한 예술가였다. 술 먹고 놀기도 하고 친구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열심히 그리지 않았던 적은 없는 듯하다. 하루 종일 죽도록 매진했느냐, 생업을 하면서 해 나갔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림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일본 유학 당시는 한창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고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가 붐이던 시절이다. 많은 화가가 서양 화풍을 모방할 때였다. 김환기는 조선의 정서를 담은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 시기도 있었다. 선배의 조언을 듣고 금강산을 보고 온 뒤 조선의 아름다움을 이해했고 이후 자신의 방향을 서서히 찾아갔다.
"원고 석 장 쓰고 시간이 있어서 잠잘 때까지 몇 자 쓰오. 우스운 얘기지만 나도 미술사에 남을 화가인 것 같아. 꼭 그렇게 하고 말 테야. 이건 허영이나 성공, 출세욕이 아니야. 나도 그림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일류의 새로운 세계, 다시 말하면 창조를 하는 거야. 일류는 창조해야 하지 않나? 더욱이 예술은 창조의 일이거든. 내 지금의 일(제작)은 진정 창조인 것 같아. 내 파리에 나가서 한번 해볼 테야."
아내 김향안이 파리에 먼저 가 유명 화상들을 찾아다니면서 김환기를 데려올 준비를 하던 시절, 그가 들뜬 마음에 아내에게 쓴 편지다. 몇 년 뒤 미국에서 재료 살 돈이 없어 신문지에 습작하던 그는 이런 일기도 썼다.
"봄내 신문지에 그리면서 나를 발견했다. 내 자산은 '자신(自信)'뿐이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희망으로 가득 차다."
마흔다섯이라는 나이에 도전했던 파리에서는 기대했던 성취를 얻지 못했다. 상심이 컸을 텐데도 그는 돌아와 그림을 더 열심히 그렸다. 쉰 살의 나이로 다시 한번 미국화단에 도전했다는 것도, 새로운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거듭 창조했다는 점도 놀랍기 그지없다.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변모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무엇도 그의 예술에 대한 열의를 막을 수 없다고나 할까.
그의 그림을 보기 전에는 그가 미국에서 이름을 알렸다기에 외국을 동경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림을 보고 그의 작품에 백자나 우리나라 정서가 많이 담겨 있어서 오해였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민족에 대한 사랑이 이만큼이나 크다는 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해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한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라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 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더욱 역력히 보이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그의 그림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정서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리운 것들은 다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것이다. 고향 산천과 바다, 옛집,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 성북동의 정겨운 마을 풍경과 학이 어우러진 산새. 백자와 고가구, 민중의 일상에 담긴 조선의 정서와 아름다움.
"백자 항아리에 '평범'이 없었다면 조선백자는 오늘과 같이 미의 왕좌에 앉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백자라는 테마를 발견하고 했던 말 (혹은 했을 법한 말이라고 작가가 생각한 말),
"그래, 이것이 신사실 백자다. 내가 그린 건 조선백자가 아니라 조선 시대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넉넉한 마음이다. 흰옷을 입고 거리와 장터를 활보하던 그들의 모습이다. 이웃과 어려움을 나누던 둥근 마음이다. 삐뚜름한 원은 그들의 순박한 마음이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전쟁이 끝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뒷집 할머니가 빈집을 돌아다니며 텃밭이나 마당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두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돌아올 이웃들 끼니를 걱정하는 이런 마음이 화가가 백자에 담고자 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옆에서 내조하며 그의 복장 터지는 예술가로서의 선택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는 그의 아내 김향안이 어떤 면에서는 수화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놀라운 면모는 책 전반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둘은 사랑이 넘치는 부부였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피우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못 버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가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 두고 먹여본 적이 없다. 과용하고 돌아오는 길, 몇 알 사 들고 와서 손에 쥐여주면 그만 어린애같이 좋아한다. 나는 아내가 능금을 움푹움푹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아내 말고도 김환기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윈스턴 부부는 무명일 때 김환기의 작품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나중에 미국에 자리 잡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암으로 사망하기 전 작품을 화가에게 돌려주라고 유언했다고 하니 진정한 애호가라고 할 만하다. 늘 부재했던 아버지였음에도 자기들 나름대로 잘 자라 나중에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해주기도 한 딸들도 그의 큰 복이었다. 일급 화랑에서 일급 작가의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거절했던 자존심 셌던 예술가지만, 아비로서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딸들 걱정에 '잘 돌봐달라, 돈을 좀 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주 지인들에게 했다. 또, 그가 자기만의 세계를 갖춘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조언해 준 일본 유학 시절 교수들과 학우들. 한국의 문인들과 화가 선후배들이 많았다. 조언뿐 아니라 경제적 도움도 아끼지 않고 응원과 지지를 보낸 많은 마음이 있었다. 천석지기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소작농들의 빚문서와 땅문서를 모두 무상으로 돌려준 복을 후한 인복으로 돌려받은 게 아닐지 생각했다.
꼼꼼한 자료 조사로 (정확히는 알 수 없겠으나) 화가가 한 작품 한 작품 그려 나갈 때의 마음을 재현하고, 그 시절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담아준 이충렬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소장하고 싶어 찾아봤더니 현재 서점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온라인 중고가는 6만 원이 넘는다. 도서관의 존재도 고마울 따름이다. 책의 기획 당시, 환기재단에서 몇몇 내용의 수정을 제안했으나 작가가 거절해 그림 사용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들이 작게 실려있다. 책에 더 많은 작품이 실리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점 때문에 작가의 신념과 화가에 대해 온전히 전하고자 하는 그의 진심이 더 잘 느껴지는 듯 하다.
이제 막 김환기의 예술이 미국화단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디스크 수술을 잘 받고 회복 중이던 침대에서 떨어져 예순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뉴욕 발할라 마을에 안장되어 있다고 하니 언젠가 뉴욕에 간다면 한번 방문하고 싶다. 그전에 환기 미술관에 다시 가야지. 책에서 본 화가의 마음들이 개인 도슨트가 되어 나의 관람을 안내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