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행복

어제와 내일의 행복이 아닌, ‘오늘’의 행복

by Jihye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또 바뀌었다. 아, 요즘은 동백꽃이 제철이구나. 모처럼 안부 인사를 건네며 동백꽃에 대해 묻자 휴대폰 너머로 신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동백꽃은 특이하게 겨울에만 피고 전남과 경남, 제주도에서 볼 수 있어. 2월~3월에 만발하는 편이야. 질 때 꽃잎이 전부 붙어서 한 송이씩 통째로 떨어져서 신기하더라. 동백꽃이 여수시의 꽃인 건 알지? 시내 가로수도 동백나무고, 오동도에 동백꽃이 만개한 풍경은 장관이야.”

통화를 끝내고 엄마는 여수 바다와 동백꽃 사진을 여러 장 보내주었다. 지금 피어 있는 꽃을 보는 일이 저리 좋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철 행복』을 열었다.

이 책은 김신지 작가가 24절기에 따라 1년을 살아본 이야기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인 24절기. 절기는 태양이 1년에 걸쳐 이동하는 한 바퀴를 스물네 개로 나눈 전통적인 역법이다, 작가는 이를 “사계절이라는 너른 보폭을 스물네 계절로 쪼개어둔 것”이라고 말한다. 다정하게도 해마다 돌아와 삶을 새로고침 해주는 절기는 “해의 약속”이며, 곧 눈앞의 계절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기회가 스물네 번 찾아온다는 약속이라고 덧붙인다. 지금 계절이 주는 풍경을 놓치지 말고 시간에 쫓기며 살기보다 딱 계절만큼의 보폭과 속도로 살아가라고. 그래서 더 자주 웃고 행복해지라고. 이왕이면 네 번이 아니라 스물네 번.

‘제철’의 사전적 의미인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작가의 다정한 안부 같은 글을 읽다 보면 한 번뿐인 ‘오늘’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피게 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깨달았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계절과 계절 사이의 설렘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애매하고 이도 저도 아닌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 때문일까. 계절과 계절 사이의 흐름과 변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알아차렸다. 그런 나에게 작가는 조곤조곤 계절과 절기를 설명해 준다.


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아니라 늘 ‘이미’ 와있다. 입춘부터 곡우까지 모든 모습이 다 봄이다. 그걸 알게 되면 봄이 짧다는 말 대신 눈앞의 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길게 펼쳐진 봄의 화폭에서 오늘에 해당하는 그림을.
- 『제철 행복』, 44쪽


입춘부터 곡우까지 모든 모습이 다 봄인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아 애매한 날도,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답답한 날도 모두 의미 있는 순간이고 인생의 계절이지 않을까? 삶은 확실하고 뚜렷한 날보다 미정의 시간과 불확실한 순간이 더 많다는 것을, 기다림이 오래 지나야 할 일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미정의 시간, 불확실한 순간도 인생의 계절에 넣어야지. 그런 오늘도 귀하게 여기며 ‘제철 행복’을 누려야지. 어제의 행복도 아니고 내일의 행복도 아닌, '오늘'의 행복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오늘의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2025년의 ‘제철 행복’을 미리 심어둔다. 봄에는 지치지 않는 희망을 새해 숙제로 제출하고, 봄꽃을 집에 들이고 냉이 튀김을 해 먹어야겠다. 여름에는 작은 것들이 자라서 세상을 가득 채우는 소만처럼, 가까운 이들에게 작은 안부를 자주 건네야지. 비 내리는 소서 즈음엔 창덕궁 희우루 가기. 가을에는 계수나무를 아는 사람이 되기. 한로 즈음엔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는 창덕궁 후원을 방문해야지. 겨울에는 새알심 가득한 동지 팥죽을 꼭 챙겨 먹어야지. 한 해를 돌아보고 마음과 일상의 닳은 곳을 수리하고 다듬는 시간을 마련해야겠다.



창덕궁 희우루에서 '제철 행복'

‘이미’ 내 곁에 온 봄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넨다. 이곳 희우루에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의 기쁨을 새겨 둔 정조의 어진 뜻이, 비 오는 날의 명소를 알려주고 함께 기뻐하고자 글로 남기고 절기마다 고심해서 제철 숙제를 건넨 작가의 마음이 나에게 닿았다. 이 책의 감동을 ‘책 읽는 마음’에만 기록하면 혼자서만 그 기쁨을 누리게 되니 함께 나누고자 독서 에세이를 남기는 내 마음도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그러니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 번뿐인 계절을 귀하게 여기면서, 한 번뿐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겨울 숲의 저 나무들처럼, 신의 부재 속에서도 할 일을 찾았던 옛사람들처럼.
- 『제철 행복』, 334쪽


엄마의 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