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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에게 알려준 것들

내 맘대로 자기소개서(20~30대의 나)

by Jihye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짝사랑은 20대에도 계속되었다. 숫기 없고 투박했던 여수 소녀는 고백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끙끙 속앓이만 했다. 대학생 때는 짝사랑하던 선배를 향한 마음이 너무 힘들어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라고 일기장에 쓰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일기장에 털어놓으며 그 시기를 지났던 듯하다.

그것이 내 쓰기의 시작이다. 짝사랑이 나를 쓰게 했고, 다시 신 앞에 서게 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는 석사 논문과 짝사랑을 했다.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며 외롭고 고달팠다. 일과 병행하며 최선을 다했으나, 최종 심사에서 탈락하는 실패를 맛보았다. 잠시 좌절하고 다시 두드리고 파헤쳤다. 대답 없는 논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결국 논문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이루어졌고, 두 번째 도전 끝에 석사 논문을 완성하고 7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쓴 논문의 내용이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논문을 썼던 과정은 나의 구석구석에 남아 글쓰기에 도움을 준다.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추는 글을 구성하고 기한이 정해진 글쓰기 숙제를 어떻게든 완수한다.

​기적처럼 짝사랑이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래서 짝사랑은 이제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난이도 최상의 짝사랑 상대를 만났다. 그들은 바로 아들과 딸.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이라 생떼를 자주 부리는 그들을 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땅속을 파는 일은 끝이 있는데, 아이들 마음을 파는 것은 끝이 없구나...’

육아에 지친 어느 날, 나는 이런 말들을 적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남매를 돌볼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고집부리는 아이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묻고 내 생각을 전하고 상황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조곤조곤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짝사랑이 아닌 '서로 사랑'이 되어간다.


故 장영희 교수님의 짝사랑 예찬을 얼마 전 다시 읽어보았다. 일기장에 짝사랑의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던, 논문과 씨름하던 20대의 나를 떠올리며.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 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 역시 수반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고 사랑 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중략) 창밖의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다시 한번 다짐한다. '불혹'의 편안함보다는 여전히 짝사랑의 고뇌를 택하리라고.”
-『내 생애 단 한번』, 34~35p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일이, 석사 논문을 완성하는 과정이, 두 아이를 말귀 알아먹게 양육하는 짝사랑의 시간이 아프고 괴로웠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과정임을, 그 시간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쓰면서 깨닫는다.


장영희 교수님은 불혹의 편안함보다 짝사랑의 고뇌를 택한다고 하셨는데, 그 나이가 된 나는 글쎄다. 자주 편안함을 택하고 싶고, 아주 가끔 짝사랑의 고뇌를 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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