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을 읽고
"너는 지금 네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구나. 실컷 쳐라. 지금 네 안에 있는 이야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바닥을 치는 시기인 거다. 그렇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바닥을 쳐봐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울릴 줄 아는 거야.
-『아무튼, 디지몬』, 73-74p
작가의 스승이 해준 이 말이, 갑자기 쓰러진 엄마가 지체장애인이 되고 엄마를 돌보는 일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 작가의 서사가 마음을 울려 이 문장에 한참 머물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작가의 단단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렇게 『천 개의 파랑』이 탄생했다는데,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어찌 안 읽을 수 있을까?
『천 개의 파랑』은 작가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놓은 한 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문장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과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2035년, 경마 경기의 기수는 인간에서 휴머노이드로 대체된다. 빠르게 달리기만을 강요당하다 연골이 닳아버려 더는 뛸 수 없게 된 경주마 투데이, 투데이의 파트너인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 부서진 채 폐기를 두고 있는 콜리를 집으로 데려가는 로봇 분야의 천재 소녀 연재, 휠체어를 타는 연재의 언니 은혜, 불의의 사고로 소방관인 남편을 잃고 은혜와 연재 두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보경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이들 중 보경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두 딸을 향해 뻗은 손은 언제나 닿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한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은혜에게 의족을 달아주지 못했다는 부채감, 은혜에게만 신경 쓰느라 연재의 재능을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런 보경이 다친 마음을 회복하고 조금씩 두 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우연히 집으로 들어오게 된 휴머노이드 콜리와의 교감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콜리와 대화하며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편을 잃고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사는 보경.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긴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콜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천 개의 파랑』, 286p
계속 빠르게 달리기만을 강요당하다 연골이 다 닳아버려 더는 뛸 수 없게 된 경주마 투데이처럼 우리도 '빨리빨리' 달리느라 마음이 닳아버린 건 아닐까. 그런데 빠른 속도, 효율성, 이익을 중시하는 시대에 천천히 달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러닝조차도 '빨리빨리' 정신이 발동한다. 남들처럼 해 보겠다고 공원에서 무턱대고 뛰어 봤지만, 숨이 턱턱 막혀 1분도 채 뛰지 못했다. 내 몸 상태를 살피지도 않고 주변을 의식하고 유행만 따라간 결과였다. 며칠간은 빠르게 걷는 것부터 시작해 몸을 적응시켰다. 그렇게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나는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조급해하지 말고 나만의 속도로 뛰면 되듯, 공부도 일도 자녀도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어진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늘의 행복'에 집중하기. 조금 쉬엄쉬엄 걸으면서 주변 풍경도 눈에 담으며,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살기. 이것이 콜리가 말한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산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 그가 익힌 단어가 천 개였고, 하늘을 좋아했던 콜리는 그 천 개의 단어가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라 인간의 일을 전부 '천 개의 파랑'이라고 이름 짓는다. 이것이 책 제목이 『천 개의 파랑』인 이유다.
가까운 미래에 콜리 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나는 이제 숨이 차지 않은 속도로 그와 함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빨리 가는 삶이 아니라 오래가는 삶을 선택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