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듯 시작한 제주 한달살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년간 일을 하고 공부도 하며 보냈건만 왜인지 방황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지만 사실 마음 가는 일이 없었다. 정성스럽게 무언가에 임해보지도 않았고, 빠질 듯 몰두한 적도 없었던 거 같다.
가게 창밖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팔월 한여름, 나는 팥과 콩고물이 사방으로 떨어진 테이블을 닦다가 그만 고등학교 친구가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놀러 가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그 모습이 내겐 너무 서럽게 느껴졌다. 놀러 가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대학생은 방학이라 모두 각자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나는 나이가 무기라는 스무 살에 무엇을 하고 있지? 끝도 없이 자기 연민이 시작되었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결단을 내린다.
떠나자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학교를 합격하고, 입학금까지 냈지만 순식간에 풍비박산 난 집안 환경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큰 평수에서 방 하나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도 적응이 되는지, 이 년 동안 일하면서 자기만 하던 집에서의 생활도 어느덧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익숙함은 꽤 찝찝하고 문득 무섭게도 느껴질 때도 있었다.
시간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난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생각만 해도 움츠려지게 되었다.
이미 내 또래 대부분이 다니는 대학교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만 하는 내 모습에 초라함을 느끼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이 생활을 지속한다면
내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과연 있을까?
돈을 벌지 못하고 놀기만 하더라도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늘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던 스스로 마음이 자꾸 불편해졌다.
뭐라도 시작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다시 공부에 몰두해 대학교를 가자니 그건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 시기에 꾸역꾸역 아르바이트만 나가다가 조금 모아둔 돈을 가지고 냉기만 흐르는 집에서 벗어나 지인 한 명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외국은 무섭기도 하고 금전적으로 꽤 빠듯할 거 같아서 방향을 국내로 틀어 제주도로 가기로 정했다.
당시에 조금씩 제주도 한달살이가 유행을 타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동쪽에 있는 김녕에다가 게스트하우스 한 달 치를 잡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짐은 여벌의 옷과 속옷, 지갑, 여성용품, 그리고 필름카메라와 필름이 전부였다.
스무 살 때부터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필름카메라와 동행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 큰 카메라로 일상을 찍어 기록한다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애착 가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필름도 기본 만 원이 넘어가지만, 그때만 해도 필름 하나에 삼천 원도 안 했었을 때라 부담이 없었다.
되려 그 당시에도 현상과 스캔 작업도 필요하다 보니 돈 깨지는 취미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간 제주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길치인 내가 배낭 하나로 잘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가방 구석에 필름과 카메라를 챙겨 넣으니 참 든든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걸어보자. 원 없이 좋아하는 바다를 실컷 보자”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나의 살길에 대한 궁리를 진지하게 해 보는 것, 이번 여행의 테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