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과 오월 그 사이
제주도 김녕에서 한 달간 머물며 처음으로 고사리 장마를 경험했다.
비자림으로 가는 길에 지도가 어느 순간부터 사람 인적이 드문 산길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정말 야생 동물과 바람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고, 또 얼마나 질퍽거리던지
신발이 황토색으로 물들여졌다. 이렇게 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길이 험악했다. 운동화가 아니라 장화를 신고 왔어야 할 정도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낮임에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찬송가를 부르며 걷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트럭에 짐을 싣고 있는 분을 만났다.
그에게 난 낯선 이지만 나에게 그는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반가웠다. 저 차를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저기요, 여기 버스 안 다니나요? 제가 여기 처음 왔는데 길을 잘못 든 거 같아요.’라고 하자마자 딱 잘라 여긴 버스가 안 다닌다는 대답뿐이었다.
비자림을 못 봐도 괜찮으니 우선은 여기서 나가야 됐다. 아저씨를 놓치면 또 다른 이가 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요 저를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라고 부탁하자 아저씨의 무뚝뚝한 표정은 변함없이 그저 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차 안에서 아저씨에게 들었는데 사월에 고사리 장마가 시작되면 고사리 따러 산에 왔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했다.
차를 타고 나가도 버스 정류장은 꽤나 떨어져 있었다. 아저씨는 내게 이곳을 어디로 걸어온 거냐며 신기해하셨고, 나도 지도를 보고 걸었을 뿐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못 돌아갈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내리려고 하는데 아저씨는 내게 귤 두 개를 쥐어주셨다.
정류장에서 그 귤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흔한 귤임에도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내리면서 조심히 여행하라고 쥐어준 귤 두 개가 방금 전 두려움에서 곧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는 비를 굉장히 좋아한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 외엔 만난 적이 없다.
비 내리는 걸 기뻐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다. 내게 있어 가장 좋은 날씨는 비 내리는 날 일 정도이니까.
제주도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러워 하루에도 시시때때로 날씨가 울었다가, 화창했다가, 바람이 불다가, 또 잠잠해지며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화창한 날씨에 다시 비가 내리겠지 싶어 기분 좋게 기다렸다. 시기가 딱 장마 기간이었던지라 어렸을 때부터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에서 살고 싶었던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한 달이었다.
우중충한 궂은 날씨 속에 비를 맞으며 견디다 못해 떨어지는 벚꽃 나무 주변을 서성거리다 근처 소품샵 겸 카페에서 감귤차 따뜻하게 마시면 노곤고곤 잠이 쏟아지곤 했다.
날씨가 화창할 때는 평대리에 가서 톰톰카레를 먹고 꼭 들렸던 요요무문.
요요무문에서 먹는 청귤에이드 또는 카페라테는 특히나 라테 아트가 너무 귀여웠다. 고양이를 그려주시고 그 옆에 조그마한 하트들까지.
그리고, 늘 곁들여 먹었던 당근 케이크 아니면 딸기 타르트! 무지 맛있어서 자주 갔다. 이 카페에는 사색하기 좋은 큰 유리창이 있는데 이층이라 저 멀리 바다까지 보였다.
날씨 좋은 날에는 돌고래 떼도 볼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월정리 바닷가 앞에 있는 무늬라는 카페를 갔었다. 이곳은 꼭 의무인 것 마냥 월정리에 갔다 하면 들렸는데 바닷가 앞에 있어도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카페 내부가 빈티지하게 잘 꾸며놓으셨다.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반미 샌드위치가 참 맛있었다. 이 카페의 컵이 너무 예뻐서 매번 커피, 초코라테, 녹차라테 등등 다른 메뉴로 마셔보기도 했다.
나중에 자주 간 덕에 카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나를 카메라로 카페 안에서도, 밖에서도 추억이라며 맘껏 담아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월정리로 향하던 길, 이 길을 지나면 좋아했던 카페 무늬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싶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