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한 가지 색
나는 죽게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고 싶다. 이 첫 문장에서 다가오는 심정이 아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운 우울감과 패배감이 뒤섞인 실패의 한 마디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비운의 시련에 절망스러운 심정을 토로하는 한 마디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발버둥치기 위한 간절하지만 소박한 염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겠다. 내가 모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함과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대한 일그러진 무언가가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되고 싶은 이유는 어찌 됐든 나열한 이유 중에 있지는 않다.
내가 이 문장에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관념으로 이 구절을 바라본다면 가장 먼저 느껴졌던 감정은 욕심이다. 정확한 통계를 알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세상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확신에 힘입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죽음을 무조건 두려워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가 다가오더라도 두려움에 떨다가 순식간에 힘을 잃어 의식은 늪에 빠져 이끌려간다. 스스로 확신을 가진 만큼 나도 물론 그렇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고통에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영원을 추구하고 싶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고, 건강에 이상이 생겨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천천히 시들어간다기보단 작은 심지가 큰 불꽃이 돼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그나마 안식할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을 놓아줄 수 있다면 이는 정말로 행운이다. 행운에 기댄 믿음으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욕심꾸러기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적어내고선 내가 이상주의자처럼 꿈꾸기 힘든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욕심은 야망으로 치환되고, 야망을 가진 사람의 이러한 신념이 누군가에게 포기라고 치부받기에는 아쉽다. 그저 삶의 종지부를 스스로 그려내고 싶은 바보다. 한낱 죽음으로 예술을 가볍게 여기고 싶은 이기주의자이다. 그리고 그 욕심꾸러기는 한 가지 장식품에 이성을 잃고 감성적으로 달려들 생각도 없다. 젊음을 잃어버릴 때까지 전부 털어내고, 인생의 서사를 졸작이 될 지언정 완성시키고,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도 모두 탕진을 위해 노력한다. 오락과 여흥을 모두 즐긴 채 후폭풍으로 돌아오는 고통의 순간과 허무함과 좌절감을 느껴야하는 순간, 나는 책임감을 버리고 잔뜩 후회와 미련을 끌어안은 채 스스로 자멸한다. 죽음을 마주하기 직전엔 이러한 후회와 미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인간성마저 포기한 채 이성을 잃고 쾌락에 취해버릴 수도 있겠다. 삶을 운 좋게 얻어낸 이상 취할 수 있는 이점은 모두 얻어간 채 안락을 얻어낸다.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갈 때쯤 손 놓고 남들의 시선에 파묻힌 채 시선을 돌려버린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죽음을 확신해야 앞으로의 내 삶의 활기가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안일하게 현재의 상황에 만족한 채 무한의 지평선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현실의 충돌이 내가 이해하기까지 세상은 영원할 수 있을 거란 안도감에 빠지게 만든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성공을 안주하게 만든다. 반드시 위기를 상상해야만 현실을 자각시키며, 미래의 확실한 소실이 현재를 긴장하게 만든다. 닦달해야만 업무를 시작하는 싫증난 직장인처럼, 외출을 생각해야만 거울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을 하는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