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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고요의 현상학(산책로에서)

by 열인

명상


첫 번째 원숭이가 왔다

산책로 옆 바위 위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며

꼬리를 바닥에 두드리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몸속까지 떨려

고개를 돌리며

도망치듯 뒤돌아 왔다


두 번째 원숭이가 왔다

풀잎이 바스락거리고

짧은 울음소리가 산책로에 퍼졌다

어제 마주친 그 인가 싶어

한 걸음 다가선 순간

빛이 흩어지듯

어느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세 번째 원숭이가 왔다

산책로 모퉁이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아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 머물다

바람결에 사라졌다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웠다.


네 번째 원숭이도 올까

내 발자국 소리를 세며 생각한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도 오겠지

발자국마다

새 그림자가 자라나듯

명상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명상도 원숭이도 없는 곳

여기 지금이 아니라면


그 원숭이 부족은

밤하늘의 별처럼

끝없는 꿈을 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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