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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인 Apr 06. 2024

리오(Rio)

인도로 간 히치하이커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의 옛 이름은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이다. 줄여서 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화가의 이름과 할리우드의 유명한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름을 애칭으로 부를 때 서양인들은 ‘레오(Leo)’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로 리오 (Rio)는 강을 뜻하지만, 레오는 라틴어로는 사자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그리스어 레온(λεων)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글로는 주로 '레오'라고 적지만 미국식 영어로는 ‘리오'에 가깝게 발음된다. 리오는 사실 뿌네에서 공부할 때 앞집에 살던 불독의 이름이다. 깊게 주름진 얼굴이 너무 못생겼던 그 녀석에게 언제 내 마음을 빼앗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요즈음 가끔 한번씩 그 녀석이 떠오른다. 외출을 할 때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그 녀석을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표현처럼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외모가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외모로 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하게 된다. 리오의 눈빛과 에너지가 이유 없이 좋았다. 낮잠 자는 줄 알았는데, 잠들 듯 그렇게 갔다는 마지막 소식을 앞집 아저씨로부터 전 해 들었을 때도 ‘나이가 들어서 그냥 갈 때가 되어서 갔나 보다’고 무덤덤했을 뿐이었는데, 그때 그 녀석을 보내며 울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제 야 왜 이렇게 아쉬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리오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몇 개월을 함께 지냈지만, 리오의 2세는 앞집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지, 가끔 조련사를 불러와 훈련을 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날 다시,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리오의 주니어는 마룻바닥에서 천정으로 튀어 오르기를 몇 번 하다가 또 그렇게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 앞집의 가족들이 다른 견공과 지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회계사였던 앞집 아저씨, 수레쉬(Sureshi)는 유학생활을 하며 살집을 찾고 있던 나에게 자신의 아파트 바로 앞집의 주인에게 소개했었다. 뿌나대학 철학 MA 과정 1년을 청강생으로 함께 공부한 클래스메이트이기도 하다. 아직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던 때라 간혹 앞집의 집 전화를 가끔 이용했는데, 어느 날 오전 강의를 듣고 집에 들어와 점심으로 가자미 찜을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고 막 먹으려는 순간,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는 노크에 아파트의 문을 열어 놓고 달려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자미를 쪄서 프라이팬에 살짝 기름을 두르고 굽고 난 뒤 그 위에 양념장을 만들어 뿌려 놓은 가자미 찜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정말 프라이팬은 깨끗이 씻은 것 것처럼 반들반들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원초적 본능에 충실했던 그 녀석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앞집 아저씨의 부인, 샐리스(Sallys)는 리오를 데리고 가서 살짝살짝 리오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넌 평생 지금까지 베지터리언으로 살아왔으니 생선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알아듣고 낑낑거리며 머리를 파묻는 리오의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사실 인도에는 채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자부심 또한 크다. 하지만 채식을 하는 사람들만이 동물을 사랑하거나 지구의 환경보전과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이나 북극에서 가까운 아이슬란드의 사람과 에스키모에게는 생존이라는 명제가 있을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우주의 구성은 인간계 아래의 아귀, 축생, 수라, 지옥이라는 사악도가 있고, 인간계 위로는 욕망이 남아 있어 욕계라고 부르는 6천이 있고, 그 위로는 물질이 있는 색계 16천과 정신만이 있는 무색계의 4천을 합하여 31천이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열반(Nirvana)이란 이러한 31천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먼저 해탈이라는 다가오지 않는 목적이 아니라, 힘든 삶에 지치고 이러저러한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일차적으로 이 삶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명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이차적으로 이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계속적으로 명상을 할 수 없다. 붓다는 윤회하는 우리 삶의 이유를 갈망과 혐오, 무지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의 삼독(탐진치)은 마음의 불순물로 쌓이고, 이것을 제거하는 마음의 정화를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명상의 원리이다.

     

우리의 마음에 쌓인 불순물인 윤회의 뿌리가 되는 상카라(Saṅkhārā)는, 불교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있다고 하는 오온(五蘊) 중에 행온(行蘊)으로 알려진 ‘반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마음의 불순물은 저 차원의 상카라와 같은 요소로 쌓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 순간 깨어 있지 못한다면 동물의 차원에 태어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간혹 영리한 개들을 보면 전생에 사람이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우리가 반려견이라 생각하든 애완견이라 부르든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을 어떻게 정서적 훈련을 시키는지, 무엇을 먹여야 하고, 어떤 운동을 시키며 건강을 돌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TV 프로그램도 있다. 주변에서 멋있고 귀엽고 예쁜 모습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반면에 버려지는 유기견 소식에 씁쓸해진다. 딩크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며 외롭지 않을까 생각하는 친구들은 키워 보라고 하지만 여전히 함께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두 달씩 집을 비우게 되면 돌보아 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찾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만큼 행복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 생명을 죽을 때까지 보살필 만큼의 책임감과 사랑이 내게 없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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