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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인 May 01. 2024

맹상이 뭐꼬

망상 또는 맹상, 그리고 명상.

명상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대학교의 불교 동아리에서 초청한 통도사의 한 스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귓가에 맴돈다. 니 저 스님이 ‘맹상’이라고 하는 데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나? 아니 잘 모르겠는데, 무슨 말이고? 바보야 그것도 모르나! 명상이다 명상! 대구 사투리의 억양으로 부산 사투리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서 계단식 강의실의 한편에 앉아 친구와 주고받았던 대화이다.

     

그때 들었던 그 스님의 법문의 내용은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오직 ‘여러분 맹상을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던 스님의 억양만이 마음에 남아 있다. 이제 왜 명상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지만 명상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은 인간관계 속에서 늘 긴장의 연속이기 마련이다. 능력의 평가로 이어지는 직장생활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기 쉽다. 한 번쯤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


고요한 마음의 평온을 원하지만 명상 중 온통 마음은 지난 일을 떠올리고 그 상황에서 내가 왜 그 표현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럽고 앞으로 그 친구를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줘야지... 집중은 흐트러진다.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평소에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떠오른다. 사실 이 마음의 현상을 직시하는 것이 위빳사나 명상 그 자체이다.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알아차리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이다.

     

호흡을 지켜보면 마음작용은 사라지고 마침내 호흡만이 남게 되는 시간이 온다. 언젠가 호흡마저도 사라지고 나면 고요함을 체험하게 된다. 집중하려는 마음도 고요해지려는 마음도 없는 고요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올라오지 않고 집중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마음은 선정의 상태이다. 그것이 한순간의 찰나삼매이든 본 삼매 이전의 근접삼매 이든지 간에 똑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다. 마음이 한 대상에만 집중하다 보면 마음의 내용물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마음의 작용은 없고 그 대상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된다.

    

마음의 정화의 과정은 묻혀 있는 생각들이 올라오는 그 자체이다. 생각이든 감정이든 몸 어딘가의 감각을 수반한다. 그때 생각이나 감정, 마음의 내용물이 아니라 감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감각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현상 일 뿐 감각이 유쾌하든 불쾌하든 상관없다. 그것에 관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갈망이나 혐오가 되기 쉽다.

     

명상을 할 때 집중의 대상을 감각으로 하고 지켜보며 알아차리는 것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감각이 행복과 기쁨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차원은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는 있어도, 느낌은 살아 있다는 증표일 뿐, 명상은 특정한 느낌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감각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이때 마음은 생각, 근심, 불안 등으로부터 벗어나 에너지를 얻게 된다. 마음작용 즉 심리작용인 염려, 불만, 기대, 추측, 상상 등이 정지되고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마음은 밝고 맑아서 명료하게 된다.      


생각과 염려, 불안, 기대, 후회 등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인지하는 그 순간은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는 순간이 된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는지?라고 의문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했으니 명상이 잘되지 못하고 있다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통제하려는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오히려 제어하려는 마음은 마음의 저항을 더 일으키게 만든다.

      

명상 중 다른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일으키기 전에 그 생각들과 기억들, 기대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으로부터 마음은 깨어나기 시작하고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설령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일어난 그 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그러한 마음이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그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비로운 자세가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게 된다.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을 때 언젠가 마음의 행위는 멈추고 마음 그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 명상 중에 집중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잡념이 계속 일어나는 망상의 상태도 아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그냥 의식이 맹숭맹숭한 맹탕 같은 상태를 그 스님의 발음처럼 맹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상 중에는 무엇이 어떠하든 우리의 의식이 결코 몸을 떠나 있어서는 안 된다.

    

명상을 한다고 해서 괴로운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수승한 수행의 단계에서는 삶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되어 수행이 저절로 깊어지는 단계가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내적 마음의 상태에 대한 묘사일 뿐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을 통해 강둑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보듯 객관적 관찰자적인 자세를 유지하게 되면 고통스러운 현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현상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받던 괴로움은 반으로 줄게 될 것이다.

     

갈망이나 혐오로 반응하지 않고 지켜보게 되면 상황을 긍정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상황을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우리가 느끼고 있던 괴로움은 반으로 줄게 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이 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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