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또는 맹상, 그리고 명상
때로 사는 것이 지겹다! 주변에 뭐 좀 더 재미있는 일이 없는지를 찾아 헤맨다. 사는 것이 때로 지겹다는 건 이 지겨움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 일 것이다. 뭐 사는 것이 뭐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되뇌면서 지겨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태어나기를 원했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죽고 살고, 살고 죽는 이 생명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 때로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문득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두려워한다.
우리 인간은 왜 이토록 생존이라는 명령어에 충실히 살게 된 걸까? 왜 살고 있는 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신비한 일이다. 사실 외로움, 공허함, 지겨움 등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스스로 의미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감기와 같은 우울이다.
인도의 쌍키여 & 요가철학에 따르면 정신의 원리인 뿌루샤와 물질의 원리인 쁘라끄르띠가 만나 먼저 ‘붓디’라는 지성의 작용이 가능해지고, ‘나’라고 하는 개체성으로서 자아가 발현된다고 한다. 이 나라고 하는 개체의식의 실상은 인도의 대표적 철학 베단따에서는 마야(Maya), 허상이라고 한다. 이론적으로 존재로서의 자아 해체의 시작은 회귀의 과정을 통하여, 뿌루샤와 쁘라끄리띠가 분리되는 궁극적 해체를 경험함으로써 ‘자아’라는 개체의식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자아는 우주의 보편적 지성작용인 마하뜨(mahat)가 선행한 후 붓디, 개체적 지성으로부터의 전개이다. 이미 개체적 생존은 먼저 마하뜨의 작용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활동의 모체인 마하뜨를 작용하도록 한 뿌루샤와 쁘라끄르띠의 접속으로 인한 것이다.
접속이 왜 일어났는지가 궁금했다. 세미나 중 지도교수님의 대답은 빅뱅이었다. 스티븐 호킹은 말했다. 빅뱅 이전의 우주는 특이점으로 응축되어 존재했고, 우주의 탄생은 빅뱅과 함께 한다고. 빅뱅이 일어났을 뿐 왜, 어떻게 빅뱅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아직 누구도 모른다는 인도철학의 '불가지론' 우주의 전개와 인류의 삶에 대한 인간의 사유가 도달한 이해로부터 되돌아오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뿌루샤가 개체적 자아,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가정 앞에 목도한다. 삶을 경험한 뿌루샤와 경험하지 않는 뿌루샤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알게 된 사실이 자신이 쁘라끄르띠(물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만약, 만약 접속이, 빅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나(절대)가 다수(개체)로 나누어진 인간, 뿌루샤는 경험적 조건 속에서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에 생명활동의 본질을 개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요가철학에 있어서 해탈 또한 분리의 과정(viyoga)을 통한 하나로의 융합(yoga)이다. 따라서 사물과 사건들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은 생명계의 지성활동 일뿐 우리가 살면서 개체적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은 집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흙, 바람, 물, 불(미세원소)이라는 4대 요소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듯,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자연환경(태양, 달, 별 등)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정보교환으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Carl Sagan)’이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분명 착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서로 도우며 살 때 발전하고 진화하면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때 몸에서는 일어나는 생화학적 작용과 함께 우리는 보람과 희열의 정신적 만족감을 느낌으로서 보상받는다.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이어져 있는 생명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힘을 가진 자가 약자를 괴롭히면서 만족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남을 해롭게 하면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또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죄의식을 느끼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하고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본질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이데아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감각을 지닌 인간이 살면서 좋은 것을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현상의 일부이다. 무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싫은 것을 좋은 것으로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결코 아니다! 우리가 반응한다는 것은 팩트(fact)이고 실화이며 레알(real)이다. 느끼는 것은 자유의지의 영역 내에 있지 않으며 선택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느끼는 자신을 지켜볼 수 있는 의식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회복할 것이다.
칸트가 내면의 소리인 정언적 명령(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에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의 본능에 지배받지 않는 행위를 선택할 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질문한다. 어떻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맞다 우리는 반응한다. 반응하는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지켜보고 관찰하는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가능하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느낌과 자각(의식)의 동시성이다. 반응보다 의식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요가 쑤뜨러(Yoga-Sūtra)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제시하는 것도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일상에서 실천(연습)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경험적 자아에 내재된 궁극적 자아실현을 위한 본능이 현존한다고 보는 요가철학에서 서로를 그냥 사랑하고, 불행을 연민하며, 행복을 같이 기뻐하며, 잘못을 평정심으로 지켜보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공존과 공감의 키워드로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마음운동이다.
이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목적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산다는 것은 창조주에 의하여 살도록 코딩된 명령어 때문인지 아닌지를,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패러다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붓다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선택이다. 다시는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