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또는 맹상, 그리고 명상.
어느 날 아침 고구마를 쪄서 식탁에 올려놓고 TV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며 부르자, 몇 개의 고구마 중에 “어느 거시 마싯쪄?” 혀 짧은 소리로 묻는다. 맛있는 것을 골라 달라는 것이다. 아뿔싸~ 하루 밤 사이에 퇴행이 일어났다? 마음이 동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히스테리나 노이로제 신경증 환자의 무의식적인 억압의식에서 부분적 기억을 자각하게 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증상을 해소한다는 최면을 통한 전생퇴행 요법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기억과 경험들은 의식되지 않은 채 현재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숙명통이라는 신통의 경지에 이르지 않더라도 더러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최면 시에 우리가 기억하는 삶의 일부는 수 천 수십만 번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했을 삶 중에 어느 생이란 말인가? 바로 앞 전생 아니면 이생으로부터 몇 번째 생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생과 관련되어 풀어야 하는 문제의 생이 호출되는 것인가?
불교의 유식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생활하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피부, 의식으로부터 즉 제7식, 감정과 생각 등과 연결된 마음이라는 의미의 말나식(末那識/manas viñjāna)에 이르기까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제8식, 종자식(種子識)인 심층의 아뢰야식(阿賴耶識/ālāya viñjāna)에 기록된다.
마음에 누적된 것들이 무의식 중에 인간의 마음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선과 악의 인(因)이 곡물의 씨앗처럼 종자로서 심어져 있는 것과 같아서 종자식이라고 한다. 이것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과거에 발생한 선악의 (원)인이 현재라는 시간에 성숙되어 (결)과로 변하여 나타나다는 이유에서다. 다시 말하자면 선업과 악업을 지었는데 부귀나 귀천, 병약한 몸, 축생, 등으로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님은 타고난 기질을 바탕으로 한 개인이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지에 따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성격(性格)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니게 된 기질 또한 기(氣)의 질(質)적인 성향이라고 설명한다(명리심리학 p.83). 다시 기질의 영향을 받는 마음(心)의 일어남(生)이 성(性), 그것을 바로 잡거나 바로 잡지 못한 결과가 격(格)이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성격과 기질 등은 우리의 잠재성향과 같이 행위가 누적된 특성으로서의 장단점으로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시대적, 문화적 환경을 만나는가와 각자의 노력에 따라 기질도 성격도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다가오는 것들을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내 운명의 결핍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찾는다. 무당을 찾아가 굿판을 벌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시 자신을 바꾸고 변화하고 싶어 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만약 우리의 행위로 누적된 선업과 악업의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악업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선업을 그만큼 쌓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수학의 1 빼기 1이 0이 되는 것처럼 엄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악업을 9만큼 짓고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선업 하나로 악업이 다 상쇄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세계는 진정성이 크게 작용하기에 선업이 악업을 상쇄시키면서 작용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무엇을 상쇄시킨다거나 얼마마한 선업이 얼마만 한 악업을 상쇄시킨다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함이 존재한다. 이 애매함 속에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 행위가 지닌 진정성일 수도 있겠다.
능력이 있는 누군가에 의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미루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부처님 시대에 ‘앙굴리 말라(Angulimāla)’는 해탈하기 위해서는 천명의 사람을 죽이면 가능하다는 누군가의 꼬임에 속아서 999명의 사람을 살해한 후에야 부처님을 만나서 깨달았다. 아라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에서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삶의 최후를 맞이하며 미소를 지으며 죽어갔다고 한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삼스까라(saṃskāra), 즉 잠재된 성향이나 기질, 경향, 성격, 특성 등으로 드러나는 어떠한 현상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찰나가 그러한 에너지의 분해가 시작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즉 알아차리는 마음의 힘을 개발하는 그 자체가 무의식 층에서 발현되는 경험된 정보에 의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다.
인식활동의 토대로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으로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기억정보의 영향으로부터 휘둘리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하는 현상, 무상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느낌 또는 감각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느낌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느끼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선업이든 악업이든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그 느낌을 알아차리는 바로 그 순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순간 될 것이다. 과거에 축적된 삼스카라(잠재 성향)에 대한 강도 높은 마음집중 훈련은 그러한 에너지를 용해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의식은 변화하는 순간, 순간이 점점으로 이어져 상속되는 흐름의 연속 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느낌에 노출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런저런 행동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현재의 경험 속에 부속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은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느꼈던 무엇이 지속되기를 바라거나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개입함으로써 우리의 괴로움은 배가된다. 그러나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마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일 뿐이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말하듯 탐•진•치라는 삼독으로 타오르는 이 인간의 마음을 외계의 문명이 에너지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