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에 더 귀를 기울여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한 번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지금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렸을 적, 특히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춘기 시절 나는 온 세상이 나만 바라보고 나의 부족함과 나의 잘못만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혹은 남들이 뭐라 하는 말에 곧잘 영향을 받아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열심히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다. 현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지만(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혹시나 내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조금은 신경을 쓰면서 그렇게 보통의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다수의 의견이 여론을 이끄는 시대에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잔인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수치심으로 사람들의 행동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로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당해도 싸다는, 마치 다수의 자신들이 정의의 사도들이고 그들에게 비난당 하는 사람들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로 낙인찍혀 마녀사냥을 당해 버리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진실과 상황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진짜 나쁜 사람이 아니고서 사람들에게는 다 그럴만한 사정이란 것이 있다. 하지만 수치심을 주는데 주저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것들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늘과 내일의 또 다른 악을 찾아 수치심을 안겨줄 대상에게 정의를 실현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여러 문제(개인들이 일일이 다 알 수 없는)들로 넘쳐나고 있으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나쁜 개인의 행동으로 인해 (어쩌면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회는 그에 수치심을 주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시키려 한다.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양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전적으로 자신이 지닌 도덕적 기준에 달렸다. 그러나 수치심을 주는 사회에서는 그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존중하고 어떤 사람들은 무시하는 집단행동으로 그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혹은 평판)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기준에 맡겨 버리게 된다.
그때그때 변화하는 유행과 이슈에 따라 그 사회에, 그 무리에 받아들여지느냐, 무시를 당하느냐 하는 문제를 상대방에게 넘겨버렸기에 당연히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만 한다는 성숙함이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있는지 조차 잊고 있을 수 있다. 대신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스스로를 맞추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들 마음에 따른 기준들은 그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서로 경쟁시키고 불안을 키운다. 어쩌면 그들 중에서 특별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줄 만큼 높이 올라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세상에 도덕적 가치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을 자신의 통쾌한 승리라 착각한다.
“그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혐오감,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자신이 존중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부끄러움이 말해 주는 것들/패트리샤, 로널드 포터 에프론>
우리는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얽매이게 되면 다른 사람의 판단과 인정에만 의미를 느끼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사람은 본래 더 높은 곳을 향하는 본성을 지녔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인정을 받고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서,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인정해 주거나 짓밟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도달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점점 뻔뻔해지는 내면은 닳고 달아 버려 수치심은 이제 다른 사람의 것으로만 여겨지게 된다. 자신은 이제 그런 인간적인 기준 위에 있다는 착각, 자만심 속에 빠져 더 이상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수치심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자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을 추종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부러워할 수는 있다. 그 이유가 선한 것에서 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을 위한 행동은 자신에게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해 주지 않는다. 그저 명성에 휘둘리는 자신을 만들 뿐이다.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남에게 넘겨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무척이나 무책임한 짓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힘들여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고민하여 마련하고 그것을 계속 발전시키며 일치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융통성이 없다고 비난받거나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한 말들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따르는 삶은 결코 인생의 마지막에 후회를 남기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비난의 이면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비난받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더 가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