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베틀은 싫어요.
정말 나랑 안 맞는 사람과 계속 알고 지내야만 하는 일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나랑은 정말 안 맞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는 투나 방식이나 행동이나 정말 다 나와 다르기에 그들의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들도 내가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자꾸 부딪치다 보니 너무 스트레스가 올라온다. 안 보고 싶은데 관계가 그럴 수 없는 관계라 안 보고 살기가 쉽지 않다. 또 그들은 나보다 어른이기에 뭔가 말대꾸를 하기에도 어렵다.
또한 그들은 엄청난 봉사 정신을 가지고 계시기에 누군가를 돕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주 풍족한 상황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렇게 누군가의 본이 되는 행동을 하기에 그 누구도 나서서 뭐라 하기가 참 어렵다. 작은 조직일수록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에게 많이 의지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정도로 나서서 일을 할 자신이 없기에 그들이 조직을 휘젓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안 맞으면 중이 절을 떠나는 것이 맞는 일이긴 한데 딱히 내가 처음부터 그들을 보고 조직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에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직을 나오는 것이 맞는지도 잘 판단이 안 서서 여태껏 뭉그적거리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평가질 하거나 때론 나도 그들의 도마 위에 올라가 난도질당하는 종류쯤은 어디나 그런 사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은 내가 그냥 넘기고 잊어버리면 되지 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저울질하는 인생의 불행배틀을 통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행동은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든다.
사람은 각자의 삶의 무게가 다르다. 누구의 전쟁이 쉽고 어렵다 말하고 판단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고민처럼 느껴질지라도 당사자에게는 힘든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문제가 누군가에게 평가대상이 된다는 것도 싫지만 자신의 인생의 고난과 무게에 빗대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 버리거나 자신의 불행보다는 낫기에 괜찮다는 둥의 말은 정말 참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난 그들과 인생의 불행배틀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자신의 불행은 자신만이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전혀 남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행에 무게를 달아 누구의 것이 더 무거운지 재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 무게를 정확히 잴 수도 없거니와 같은 불행에도 내가 느끼는 무게와 남이 느끼는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견디는 힘이 다르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다. 그렇기에 불행 역시 베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인정받은 단 한 사람만이 자신의 불행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잊고 나의 불행이 더 크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힘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의 무게가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더 무겁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 존중받아야 하고 더 배려받아야만 한다는 정의(定義)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진실인 것일까?
다른 사람이 치르고 있는 인생의 전쟁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이해'라는 마음을 사용한다면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을지라도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자신의 삶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다른 사람의 삶의 무게도 그러하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만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 것이다.
사고의 수준은 유아기를 못 벗어났는데 몸만 어른인 사람은 주변을 괴롭게 할 뿐이다.
자신의 경험 하나 밖에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불행이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부터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인생이 다회차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한 가지의 잣대로 수많은 인생의 무게들을 저울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자신의 불행배틀을 통해 고통을 저울질하려 든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더 배려받아야만 하는 이유이고, 마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더 인생을 잘 이해하고 있고 (다른 사람보다), 그로 인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자신의 말에 따라야만 한다는 기괴한 논리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사람들은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선한 동시에 악하다. 가난, 방치, 학대, 불이익 같은 그들의 과거가 마법의 가루처럼 그들을 보호해 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 불운을 겪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도덕성을 실제보다 고결하게 평가하고, 그럴 때만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할 수 있다면..... 글쎄, 그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마리아 투마킨>
불행을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물론, 나와 맞지 않는 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불행이, 그들의 불운이 그들의 현재 모습에 어떤 영향은 미쳤겠지만 그것뿐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권력도 되지 못하고 되어서도 안된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불행 역시 인정해 주어야 한다.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경험일지라도, 자신이 보기에 그의 전쟁이 너무 쉬워 보일지라도 결국 내가 져야하는 인생의 무게는 아닌 것이다. 그저 이세상에서 모두들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주어야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 역시 결코 녹록치 않은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계속 자신만의 불행 속에 남겨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