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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그들

by zejebell

사람이라면 잘못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하고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나 '잘못한 일'이란 부분에 대해 서로의 기준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태도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전혀 얻지 못할 경우 안 좋은 감정이 쌓이게 되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상식이란 것이 존재하고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잘못한 부분에 있어 상대적인 차이 때문이라거나 정말 미묘한 부분이 아닌 진짜로 자신의 잘못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두꺼운 얼굴로 '어쩌라고'를 시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사실 어느 시대, 어떤 곳에서나 이러한 사람이 있어왔다.)


집에서나 학교, 직장,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곳 등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여러 곳에서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무식하고 뻔뻔한 행동들을 너무도 많이 경험해 왔다. 사실 놀라울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직 어렸을 때라면 어른들의 그러한 뻔뻔한 행동에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고 자신이 어른이 되었을 때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힘 있는 사람들의 무시와 불합리한 행동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음에 낙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들의 뻔뻔함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왔는지 그 기원을 찾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런 행동이 한 번이라도 용납되었던 순간부터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렸을 때이든지, 성인이 되었을 때였든지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에게서도 그런 행동이 잘못이란 것에 대해 따끔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게는 새치기하고 상대방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짓누르려는 사람,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잘못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자신이 보다 나은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는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의 불만이나 불행에 무관심한 사람은 자신의 뻔뻔함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부끄러움은 주변 사람들의 몫일뿐이고 상처는 피해자만 받게 된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의 생활 반경 어디에선가 마주하게 되면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낭비하기에는 우리의 삶에 써야 하는 에너지만 해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나 이런 사람들이 한 두 명 정도는 늘 있기 마련이고 우리가 그들을 피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우리를 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런 뻔뻔한 삶의 방식을 공공연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문제 삼는 이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뻔뻔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나 언짢은 감정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자신에게 향하는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자신이 잘남, 혹은 특권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때로는 우리 자신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 조차도 특권층은 여전히 존재하며 분노조절이 힘든 대상은 여전히 약자를 향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약자에 속해있을 수 있다. 물론 약자가 늘 선량한 것은 아니다. 약자 중에서도 약삭빠른 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 그것을 자신의 특권처럼 무언가를 배려받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우리들은 자신의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얻길 바라고 가끔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미소를 한 번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따름일 것이다.


혐오스러움까지 느끼게 하는 이 뻔뻔한 사람들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도덕성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덕적 동기는 모두가 자기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 자아도취에 가까운 자기애적인 특권 의식은 자신을 도덕적 우위에 두기도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뻔뻔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건강한 사회라면 이러한 사람들이 뻔뻔해질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도덕적 기준 아래에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동의한 사회에서는 뻔뻔한 행동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란 점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까지 그런 세상이 과연 올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뻔뻔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면 피하거나 맞서는 방법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냥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뻔뻔함에 마른 장작이 되어줄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래전부터 서있는 줄 앞에 아는 사람(잘 지내기 원하는)이 나타나 앞에 세워줄 것을 요구했을 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제대로 세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뻔뻔한 그들이 물론 이러한 부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들의 특권의식에 대한 배려를 해주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손쉽게 조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 뻔뻔한 그들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뻔뻔함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을 그러한 부당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무언가 바뀌는 것이 없다고 해도 부당함에 대해 반항할 수 있는 정도의 행동은 필요하다. 현실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정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릴 때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도덕교육을 필수적으로 진행해 주길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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