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를 위한 쉼
어렸을 때 교육받기를 어떠한 상황이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배웠다. 그랬기 때문에 전 직장에서 그토록 힘들었음에도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힘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쓸데없이 온 힘을 다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에는 잘못된 사회생활로 인해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도 모르는 채 배운 대로,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잘 행동한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정신승리 비슷한 것을 하지 않았다면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했다는 후회로 그 시기를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힘들고 하루하루 버티기 어려웠던 과거의 사회생활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100퍼센트 내가 잘했다고, 도망치지 않고 잘 버텼다고만 판단 내리기는 솔직히 어려운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때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얼마나 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갈아서 직장생활을 했는지, 그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그 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한 부분이 이제야 잘 보이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비겁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세상에 자신의 생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한 생존에 있어서 위협이 될만한 것이 나타났다면 피해 가는 것이 지혜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인간들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피해 가는 지혜를 아껴야 되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무조건 피한다고 해서 모두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지혜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다만 버티다, 버티다 힘들면 자신의 능력밖에 일임을 인정하고 잠시 쉬어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세운 기준 탓도 있겠고, 이제까지 배워온 교육의 탓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클 것이다. 매일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도망쳐서 도달하게 될 어딘가에 대한 부분은 예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먹고사니즘 역시 해당이 될 것이다. 도망가서 도착한 곳이 더 낫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이 익숙한 고통과 절망에 자신을 내맡기고 살아가게 된다.
동일한 상황과 환경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대해 비슷하게 반응하거나 잘 적응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으며 자신이 잘 살아나가는데 좋은 환경과 상황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육지의 환경이 아무리 아름답고 환상적이라 하더라도 물고기의 생존에는 필요 없는, 오히려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인 것처럼 반대로 물고기에게 좋은 바닷속 환경 역시 육지의 생물에게는 위험이 가득한, 살 수 없는 환경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나를 괴롭게 하는 환경을 피해 생존에 유리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비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살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행동인 것이다. 원시시대와 같은 환경과 상황에 있어서 만일 곰이나 사자를 발견했다면 일찍 도망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행동이 될 것이다. 또한 겨울이 왔을 때 보다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 역시 생존에 더 유리한 행동이란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생존에 있어서 최선의 지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부분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면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라면 관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직장이 안 맞는다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런 방법이 없다면 잠시라도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우산을 사용하거나 몸이 덜 젖을 수 있게 큰 나무 밑을 찾아 서있기라도 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일은 늘 어디선가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해 안전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약간의 앞길만을 조심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너무 멀리 내다보는 것은 때론 쓸데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결코 내가 내다보는 미래에 데려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재를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힘들고 도저히 해답이 보이지 않는 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굳이 생명을 담보로 정면돌파할 필요가 없다. 찾아보면 돌아가는 길도 분명 존재한다. 길이 없다면 함께 할 누군가를 기다려도 좋다. 기다리면서 잠시 쉬어도 된다.
꼭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 그냥 도착할 수 있으면 너무나 행운인 것이고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밟게 될 그곳이 인생이 데려다준 목적지란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도망쳐도 될 만한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고 비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누군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주지 못하고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용기 없는 모습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