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는 너도 싫고 나도 싫고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면서 가장 답답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부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답정너'인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듣고 싶은 정답을 이미 정해놓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답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혹은 그 답을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뭔가 교묘히 남을 떠보거나 시험하려는 듯한 그런 의도가 말속에 다분히 느껴질 때 그 사람하고의 대화는 더 이상 대화가 아니게 됩니다. 사실 말을 섞기가 싫어집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의견을 갖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서로의 가치 역시 충분히 다를 수 있어 이 사람에게 괜찮은 어떤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 괜찮을 수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좀 하신 분들이라면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직장인들에게는 정해진 정답이 이미 존재하거나 답정너인 상사에 대해 대처할만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서로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고 이를 통해 서로 잘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거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득을 위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설득 역시 상대의 의견을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듣길 원하는 정답을 말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쫒기는 것은 대화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정답을 못 맞히면 찍히게 되는 무서운 심리 스릴러가 됩니다.
나는 탐정이 아닌데 질문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수시로 놓인다면 그것은 크나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기분과 분위기, 듣고 싶어 하는 말 등을 매번 파악하기 위해 긴장하고 촉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감정노동일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업무를 파악하고 잘하기도 어려운데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직장상사의 돼먹지 못한 그런 감정노동의 요구를 자신이 들어주어야 할지 말지는 적어도 나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부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늘 직장상사는, 회사는 내 능력 이상을 뽑아내기 위해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잘해도 절대 잘했다는 인정을 쉽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것이 정상이라고 인정해 버리게 되면 자신 역시 회사로부터 답정너의 한 부분을 받아들이게 돼버리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느끼게 되는 자괴감이나 무능력감을 너무 크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회사나 직장상사는 답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답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자신의 답에 회사가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능력 없는 나만 남아있는 것일 수도...ㅜ.ㅠ)
제가 직장 생활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래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인지 과거의 회사경험을 통해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박혀있어 현회사의 (무리하다고 느껴지는) 요구를 너무나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제가 해야 할 일에 들어있지도 않았던 업무가 어느새 답정너인 직장상사의 말에 세뇌가 된 것인지 알아서 그들이 원하는 답을 찾아 열심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정말 너무 무능력해 보이고 싫습니다.
회사의 정해진 답이나 요구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나 자신은 나의 편이 되어 스스로의 감정을 변호하고 무능력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서 누군가의 요구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자신을 맞추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됨에 요즘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물론, 능력이 되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업무를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만 내 업무가 아닌 것까지 일부러 끌어안고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인이란 이래야 된다는 내 안의 답정너의 모습과 회사에서 원하는 좋은 직원의 모습보다는 스스로 (세뇌가 아닌) 자부심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새해 결심을 조용히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