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부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다.
일만 잘하기에도 힘든 직장생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난이도 AAA의 특급 기술이 존재한다. 바로 아부의 능력이다. 이것은 잘만 활용하면 상사에게 그동안 일만 죽어라 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완벽한 아부는 특상급 기술로 아무나 구사할 수 없다. 타고난 부분도 있어야 한다. 업무에 있어서 능력만 키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면 인정은 당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열심히 일만 했다.
플라톤은 아부를 사회적, 정치적 질병으로 봤다. 아부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도덕적 타락으로 정의되었다. (그리스 시대).. 중세 시대에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잠재적으로 사회를 동요시키는 요소로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사회가 보다 인간 중심적이고 활동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아부에 담겨 있는 경멸적인 뉘앙스의 농도가 점차 엷어지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아부라는 단어에 대한 조롱의 강도가 비로소 점점 약해진다.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표현하는 것. 특히 화가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과 일종의 도덕적 이완, 굼뜬 무심함', '실수를 그럴듯하게 얼버무려주고 완화시켜주는 것' 심지어 '대범하고 관대한 행위'로까지 설명하고 있다.
<아부의 기술/리처드 스텐걸>
상사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도 안신나지만 제일 신나는 척
현재 우리나라 한글 사전에서의 아부는 '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림.'이라고 정의되어있다. 다른 사회에서 의미하는 것에 비해 유독 우리나라에서 '아부'란 단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서 '아부'란 단어의 느낌은 아직 서양 고전 시대와 비슷한 의미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부정적 이미지 탓으로 직장인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부 이다. 그런데 또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 필요한 것이 '아부'란 것이다. 이런 아부의 이중성 때문에 직장인들 중에 아부를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 한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동료가 아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부를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고 왠지 아부하는 동료가 먼저 승진이라도 하게 되면 꼭 그것이 아부 때문인 것처럼 느껴져 아부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아부'는 정말 간신배 같은 사람만 하는 것일까? 아부를 잘했던 동료는 과연 아부를 잘해서 승진한 것일까?
내적 평화주의자인 우리에게 좀 힘든 미션인, 그래서 이제껏 회피하고 있었던 '아부'에서 이제 그 단어가 주는 부정적 느낌에 대한 편견을 깨고 우리 스스로가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아부하는 것이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써 타인의 비위나 맞추고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서비스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열심히 일만 하는 직원을 먼저 인정해 주는 직장상사는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은 자기기만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아부라고 하는 질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마키아벨리)
그러나 결국 사람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