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왜 중요하는가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 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기대되는 영화는 개봉일에 보는 습관이 있다. 물론 오펜하이머 또한 개봉일에 맞춰 예매를 해두었는데, 복작한 분위기에서 볼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되어 일부러 늦은 심야로 예매를 했으나.. 사람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개봉일에 광복절인 탓도 있겠지만, 확실히 한국은 놀란 감독을 좋아하나 보다. (이 영화를 광복절에 개봉한 것은 너무 의도하긴 했다.)
늦은 시간이고 3시간이란 긴 러닝타임 탓에 피곤하기도 했지만, 전기 영화가 그렇듯 주요급 인물들의 서사들을 어느 정도 미리 알고 간다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다. 최근 놀란 감독의 인터뷰 몇 개를 찾아보았는데 영화는 캐릭터의 감정을 체험하는 일종의 참여 행위라고 하더라. 실제로 내가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간접적으로나 체험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물론, 연출과 연기 모두가 대단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영화는 본격 오펜하이머 변론 영화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를 위한 청문회가 열리고, 청문회에서 본인 포함 주변 인물들이 질의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전반적인 내용이 진행된다.
오펜하이머는 극중 좌파 성향이 강했던 인물인데, 실제로 공산당에 관한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원들과 교류가 많았다. 친동생 또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아내 또한 공산당원 출신이었지만 결코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선을 지키고 애국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은 나치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극비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이를 그로브스 소장이 지휘하게 되는데, 과학자들의 대표로 오펜하이머를 지목한다. 미국은 원래 오펜하이머를 조사하면서 그가 공산당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대한 프로젝트에 리더 자리에 오펜하이머를 앉힌 것부터, 이미 미국은 오펜하이머가 실제 혐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년에 걸친 프로젝트는 트리니티 실험으로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실제로 전례 없는 살상 무기를 만들어 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오펜하이머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세계 전쟁의 종식을 위해 전 세계에게 핵폭탄의 위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2차대전은 끝이 난다.
이후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며 오펜하이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자기 손에 피가 묻었다고 표현할 만큼 엄청난 자책감과 회의감에 시달린다. 다들 cg 없이 찍었다는 트리니티 폭발 장면에 집중하는데, 나는 그 이후 보여주는 오펜하이머의 감정선이 이 영화의 주요 감상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전례 없는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지만, 소련 또한 핵무기를 만들고, 이에 대항하여 더 큰 힘인 수소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뿐이었다.
수소폭탄 제조를 추진한 스트로스는 영화 내에서 오펜하이머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었고, 이를 신호탄으로 그를 AEC(미국에너지국)에서 추방하기 위해 과거를 들추며 청문회를 연다.
오펜하이머는 천재 과학자이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등 흠결이 있었으며, 결코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했고, 오펜하이머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평범한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이를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오펜하이머는 매 순간 '진심'이라는 선택을 한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미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본인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며 평생을 추앙받고 살 수 있었으나, 본인이 낳은 무기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이를 단순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비해 스트로스라는 인물은 개인적인 원한으로 오펜하이머를 사지로 내몰게 되는데, 여기엔 어떤 부끄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욕망과 악의가 타인에게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거기엔 타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 믿는 신념과 이념이 중요할 뿐이다. 오펜하이머가 만든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주민들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지나간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뿐이다.
오펜하이머 리뷰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