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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8)

친구들의 모습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달동네라고 한다.

맞다. 당시 전기도 자주 끊어져서 달빛을 보며 지낸 적이 많으니까.

배창호 감독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1982)"

보러갔었다.

관객들은 가끔 비명을 지르고

신음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모처럼

향수(鄕愁) 떠올렸다.

"나의 살던 고향은 달동네이지요"


하루도 쉬지않고

뛰어다니는 아해들.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친구들.

"From Hand To Mouth"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남녀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생활전선

아니 생계(生計) 위해서 사회로 나아갔다.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었다.


이 때 생존에 일찍 눈을 뜬 몇몇 친구들이

떠오른다.


 친구는 지리와 광물에 지혜가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 있지만

효창공원(孝昌公園)근처에

경의중앙선(京議中央線)철로가 있다.

길동(가명)이는 철로(鐵路)주변을 돌아다니며

구리와 신주를 주어모았다.

무엇이 구리(copper)이고

신주(Brass,黃銅) 어떤 것인지를 잘 구별했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구리와 신주를 모아 고물상에 가져다주면

약간의 돈을  준다.

길동이는 구리와 신주를  모으는 재미에

효창동에서 수색까지 걸어서  다니기를

식은죽 먹듯이 하였다.

자연스럽게 학교에 가지않아 결석하는 날이

출석하는 날보다 훨씬 많았다.


두번째 친구는 용팔(가명)이었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무엇이든지 그의 손에 붙들리면

작품이 되어서 햇빛을 보았다.

이미 국민학교 5~6학년 때부터 그리했다.

우리 모두 가난했지만

사실 우리들이  가난한 계층에 속한  줄을

잘 몰랐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용팔이는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중학교에

먼거리를 통학하여야 했다.

어느날 그는 닭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돈이 어디에서 났니?"

그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를 걸어다녔어."

그 먼거리를... 아마 걸어서 아니 뛰어도

한시간 반은 넘게 걸릴 거리를

2개월이나 걸려서 도보(道步)로 다니고

버스비를 모아서 닭장을 만들었다.

작은 병아리가 "삐약 삐약"거리면 울어댔다.

그는 동네에서 버려진 배추잎사귀를 모아서

병아리에게 먹였다.

가끔 한강다리(제2한강대교)  아래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당시에는 메기 미꾸라지 등이 서식했다)

병아리에게 먹이기도 했다.


이미  용팔이의 진로는 결정되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동차공고로 진학했다.


세번째 친구는  장기(將棋)놀이의 천재였다.

나보다 네살 정도 어렸으니까.

당시 2~3학년 정도 되지 않을까?

장기에 씌여진 한자(漢字)읽기도 어려울텐데

이 친구는 장기를 잘 두었다.

동네 복덕방 아저씨들은

마치 자신들의 손주처럼  명구(가명)

매우 아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명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언제가 복덕방 앞 평상(平床)위였다.

늘 어른들과 장기놀이를 하던가,

어른들 옆에 앉아서 장기훈수를 하는 것이다.


학교공부는 이미 뒷전이었다.

지금처럼 프로장기가 있었다면

바둑에 있어서 영재 이창호 혹은 신진서가

아니었을까?


모두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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