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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마지막)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산가옥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와우(臥牛)아파트 붕괴사건 이후

우후죽순(雨後竹筍)격으로

소위 연탄보일러가 시공된

소형 시민아파트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매일 연탄을 갈아넣어야하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보면서

전통적인 가구의 온돌보다

보일러 시스템(Boiler System)이 장착된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ASKUP이 그려낸  그림

점차 앞집이라고 불리던  적산가옥이 헐렸다.

정부의 도시계획의 일환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두서너해가 지나가도

적산가옥이 사라진 폐허(廢虛) 

아해들의 놀이터가 되었을 뿐,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주민대표와 건추업자 사이의

뒷돈거래와 부도 등으로

건축이 중단된 모양이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했던가

술렁거리던 건축붐은 잠시 멈칫거렸다..


이런사태가 반복되자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규빈곤층(新規貧困層)이 진입하여

그 자리에 대체제(代替製)가 되었다.


1970년대초에는

서민아파트 건춬과 아울러

이른바 맨션(Mansion)이란 이름의 아파트가

건축붐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이 때 유명한 영화배우,  가수를 비롯하여

돈 꽤나 만지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상징이 되었다.


니도 1974년까지 살다가  떠났다.

이 때 모래밭 무우 배추밭이었던

반포에 고급아파트가 줄지어

세워졌다.

ASKUP이 그려낸 적산가옥의 남매 그림

적산가옥!

가난했지만

가난한 줄 몰랐던 삶의 터전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이산가족들의 애환이 담긴

향수가 가득한 고향.


이곳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태어났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나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제 시간이 꽤 흘렀다.

벌써 5,60년이 흘렀다.

내가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가끔 적산가옥이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보지만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회색무덤과 같이 아파트 클러스터로  변하고

사람들 냄새는 콘크리트 냄새로

희석되었다.


"아줌마 외상 달아주세요."

"뭔대?"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린다.

"김치 한 봉다리요."

"그래 알았어. 지난 주 외상값 빨리 갚아라

  우린 흙 파서 먹고사니?"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알았어요 봉급받으면 일착으로 갚을께요"


이젠 이런 대화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가난했지만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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