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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세요

용서할 준비는 하셨나요?

"사과하라.

 진정성이 있는 사과를 요구한다."


그런데 종종 혼란스럽다.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진정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진심어린 사과만 원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배상금  액수와 형식을 가지고 다툰다.


이것이 "사과만 원한다."의  진정성인가?


사실 우리는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사과의 진정성을 요구하는 만큼

진실된 용서가 준비되어 있는가?


어떻게 보면

사과가 용서의 전제조건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용서가 사과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워싱턴이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를

실수로 꺾었을 때

아버지는 "제가 그랬어요."라는

아들의 고백에 대해

"왜 그랬니?  

 지금 진짜 잘못을 시인하는 거니?"라고

묻지 않았다.

단지 용서했다.

이는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그러하다.

"회개하라 용서할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회개하라 

 그리하면 이미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어머니가 자녀의 잘못을 꾸짖을 때도

어머니는 이미 자녀를 용서했다.

용서한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야단치는 것이지

자녀가 용서를 구하는 정도에 따라

어머니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사회를 돌아보자.

과연 우리사회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엄밀히 살펴보면

"사과하라!"고 요구했을 때

"사과한다"라고 말할 때

"진정한 사과인가?"라고

또다른 시비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사과는

이미 용서한 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우리는 잊고 있다.

다시말하면 용서할 마음이 없이

즉 정죄할 의도만 가지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먼저 용서할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 이미 용서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피해의식이 아니라

큰마음을 품고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사과를 요구하는 사회분위기가

전제되기를 바란다.


용서하는 자에게 평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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