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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몇살이오?

나이의 새로운 계산법

"몇살이오?"

내게 물었다.

나는 멈칫했다.

"어찌 대답해야 하나?"


살아온 날

이미 내곁을 떠나간 날을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을  

산해야 하나?


흔히 말하는 나이는

전자에 해당하지만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아버린 날

그 안에는 살아낸 날도 있지만

무의식 속에 스쳐지나간

의미없이 흘러가 버린 날들이

뒤섞여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의미있게 살아낸 날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참된 의미에서 나의 나이

살아가야 할 시간

앞으로 나에게 남은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계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지막 사건인 죽음(death)이다.


근세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Renaissance)시대에

인문학의 꽃이 자유를 얻어

만개했던 시기였다.


이때 인간의 자유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급기야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로마 철학자

에피쿠로스

(Epicurus:B.C.341~271)는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에픽테토스

(Epiktetos,?55-?135)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죽음이란

 현재와는 상관없는 미래의 사건"

이라고 말했다.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죽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사는 법도 가르칠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만이 아니라

 입으로도 죽음을 줄곧 되뇌는 것

 곧 그것이 내 습관이다. "라고

말했다.


문제는

죽음 즉 이 땅을 떠나야 할

그 시간을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찾아온 그 시간을

몰랐던 것 처럼.

그렇다면

나의 나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결론은 모른다는 사실에 다다른다.


그러면 여기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는 매일 "오늘"과 헤어지고

우리는 "매순간"과 이별하며

전혀 낯선 새로운 순간과 내일을

현재와 오늘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Apostle Paul)은 말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I die every day.)"

다시 말하면

"나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I'm born again every day. )"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나이는

매일 한 살이다


그렇다.

나와 그대, 우리 모두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오늘을

살아간다.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이 지나면

헤어지고 다시 소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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