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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4)

1인칭으로 전개하는 예수의 이야기

<기다림 끝에 마리아를 찾다>

비가 오지 않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다림엔 끝이 있을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짓밟혀 사라진 지

800년

남유다의 영토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게 짓밟혀 온 지

600년.


하나님을 저버린 대가를 치루면서도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뿐.


농부가 기나긴 가뭄에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데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고요한데 누군가 마리아를 찾았다.

"내가 너를 통해 메시아를 보낸다."

여인의 몸에서 난 자가 뱀의 머리를 친다 하였는가?


"아 기다림이

성취로 이어지는구나!"

마리아는 기뻤다.

그 비밀스러운 기쁨의 소식을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


그러나 사내도 아니고 아낙네도 아닌

처녀의 몸에서 일어난

이 황당한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어차피 믿음은 사라지고

어리석은 자신의 주장만 난무한 세상인데.


마리아는

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길고 긴 기다림이

이제 침묵의 고요로 또 이어지는구나.

소리 없는 아우성.


우리는

이러한 어둠이 깊어지는 때에 마리아를 선택했다.


그 길고긴 어둠의 늪,

깜깜한 터널의 끝을 벗어나자.

빛이 세상에 온다.

때가 가까왔다.

"The Kingdom has come near.“

<마리아를 통해 내가 세상에 오다>

마리아가

나를 수태(受胎)하던 날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에 접어들었다.

마리아는 요셉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태를 축복하셨다."

요셉은 이 순간 말을 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모든 소리를 다 들어도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들은 것보다 읽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은가?


없던 말도

지어내 말하려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닌가?

때로는 말 하고 싶은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에

얼마나 많이 분노하지 않는가?


요셉은 본의 아니게

언어장애의 길을 걸었다.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가 경험했던 것 처럼.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아니 세상에 로고스(λόγος)로 왔다.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을 준비하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을 준비하여 주었다.

엘리사벳 또한 당황했었다.

"아들을 임신하다니."


엘리사벳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와 같은 심정이었다.


나이가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 둘은 자녀를 생산하는 일에

희망을 접은 지 꽤 오래되었다.


기대조차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천사를 사가랴에게 보냈다.

"너의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는 아브라함과 사래와 똑같이 말했다.

"우리 부부는 나이가 많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이들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의 성취보다

주변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했다.


그래서 천사는

사가랴를

"일시적 언어장애인

(Person with a temporary language disorder)"이 되게 했다.


하나님에게는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모세도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인이 되어

앞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상실한

이삭조차도

시각장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귀한 통로가 되었다.


이미 아브라함과 사래도 그리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으로 언어장애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능(disability), 불가능(impossibility)이라는 약함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어내신다.


이것이 His+Stor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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