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으로 전개하는 예수스토리
이제 약속한 대로
40일간의 기도여정이 막을 내렸다.
35일에서 40일째 되는 날까지
죽음을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힘에 겨웠다.
배고픔, 목마름, 에너지 고갈,
사선(死線)을 방금 통과하여
완전히 소진(消尽)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의 술책은
교활했으나 정확했다.
40일간 굶주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이겠지.
하지만
금식해보지 않은 자의
어리석은 접근이기도 하지.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그가 이를 알 리가 없겠지.
인간에게 음식(飲食)은
생존의 기본적 단위이다.
먹고 마실 것의 궁핍은 입을 것이나
거(居)할 것의 결핍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옷이 없었어도 집이 없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풍요를 허락했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금지한 것은
생존의 조건은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저버렸다.
지금 유혹하는 자는
"먹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되게 하라"
그는 교활하지만 어리석었다.
정체성(Identification)은
조건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나의 정체성을 흔들려고 하는 시도가 어리석었다.
그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이어서 패배했다.
유혹하는 자는
첫번째 질문을 통해서 소득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갔다.
40일 금식을 마친
그래서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든 나를
성전 꼭대기로 끌고 간 것도 부족해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이렇게 부족한가?
뛰어내리면
나를 누군가가 받쳐줄 것이라고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증명된다고..
나는 기가 막혔다.
이 어리석은 존재 같으니라고.
"아서라..
유혹하는 자는
자신의 제안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세번째 고상한 제안을 했다.
그는
성전꼭대기에서 내려와
산 꼭대기로 나를 데리고 갔다.
결국
내 것을 나에게 돌려주겠다고 하는데
돌려주는 주체가 자신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말을 섞기에도
무가치한 존재이구나.
그런데 이 자의 제안을 보니
그저 무리한 것만도 아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최고의 생존전략으로 삼고 살아간다.
조금 단계가 높아진 사람들은
"어떻게 먹을까? 어디에서 먹을까?"를 고민한다.
그래 먹고자 하는 욕구는
무한하지 않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면 사라지게 되어있지만,
물질에 대한 욕구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하니.
유혹하는 자는 나를 "꼭대기"로 데리고 간다.
유혹하는 자는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도 부족해서
자신에게 절을 하면 모
든 영광까지도 주겠다고
허언장담(虚言壮談)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유혹에 이끌리어 살아간다.
결국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나는 유혹하는 자에게 명령했다.
더 이상 토론이나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논리조차 없었다.
40일이나 금식하여
곤고함과 힘이 없어 지쳐있는
나의 마음을 공유하며
공감하는 정서적 여유 조차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존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다니.
나의 정체성(Identification)은 단지 정체성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