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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는가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예수 스토리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나를 찾아오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있다.

아니 단순하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했다

그래서 하나님 품에 안길 날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다.

그들은 고민을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그래서 감옥에 있는 세례요한을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세례요한에게 의심이 있을리 없다.

그에게 나를 향한 믿음이

흔들릴 리가 없다.

그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질문을 하나 제시했다.

너희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도록 하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순수했다.

그들은 나에게 찾아와서

세례요한이 가르쳐준 그대로

나에게 질문했다.


마침 그 때

시각장애인들,

걸을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들에게 건강한 몸을 허락했다.


그리고 나는 이들에게 말했다.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세례요한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말했다.


내 말을 전해 들은 세례요한은

무덤덤할 것이다.

이미 자신이 믿고 있는대로

재확인했을 테니까.


나는 세례요한과 제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단지 말로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애를 겪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회복을 선물로 준

그 사역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있는 그대로 알려준 것이다.


그들 안에 믿음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자리를 떴다.

이들은

나의 말을 듣고 받아들였을까?

세례요한은

세상을 향해 나를 소개했다.

"나는

이 분의 신발끈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망(亡)해야 하고

이 분은 흥(興)해야 합니다."

더 이상 어떤 표현이 필요한가?

게다가

세례요한은 자신의 발로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을 믿지않고 있다.

겉으로는

그의 추종자들(Followers)이지만

안으로는 믿지 않는다.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후자였다면

광야가 아니라 궁궐로 가야했지요.

아니면 누구를 보러 나갔습니까?"

나는

세례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추종의 목적을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보다 훌륭한 분이다.

대단한 친구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길을 준비하는 자일 뿐

길 자체인 나는 아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끝을 보기는 하지만 결국 달을 볼 수 없는 어리석음은 피해야한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전 건물을 신성시하는 일,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십계명의 뜻보다

돌판자체를 거룩하게 간주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인용하고 참고할 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설교자들과 같이

어리석지 말아라.


세상에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그보다 작은 자가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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