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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라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예수 스토리

<바리새인, 세리,

그리고 나(예수)>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거부했다.

단지 세례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율법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율법주의자라는 사실을

표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뜻에는 등지고 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이중적인 인격자라고 간주한다.

이들은

‘피리를 불면서 즐겁게 살자’라고 하면,

인생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며

진지하고 심각한 척을 한다.

사람이 죽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어도,

이들은 마치 죽음에 초연한 듯

딴청을 한다.


이들은

심장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세례요한이

떡도 안먹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면서

금욕의 생활을 하니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세례요한은 미쳤다.”라고

비웃는다.


지금 내가

가난한 자, 세리들과 식탁을 함께 하며

포도주를 마시니

저자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노는구나”라고 비난한다.

이들이

세상을 비난하고 비웃는 그 기준은

모호성이 높아서

상황에 따라 춤을 춘다.


알고 보면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옳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상은 알고 있다


저들은 회칠한 무덤 같고,

저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주검의 냄새가 날 뿐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라>

내가 일을 시작한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저 밤이 어두워지고,

새벽이 되어 햇살을 마주하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 길지도 않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걸어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행하고 있다.

이들은 왜 나를 따르고 있을까?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홀로 외치고 있을 때도 그랬듯이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고 있다.


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들을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 이상으로 이들은

나에게 복음을 듣기 원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진리를 찾는 태도는

목마른 사슴이 한 모금의 물을

찾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나에게 달려왔다.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린다.

아니 율법을 아는 서기관이

왜 뛰어와서 이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지?”


그는 나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선생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비난하고 고소하려는 서기관(書記官)이 많았는데,

이 사람은

“나를 따르겠다.”고 하는구나.


나를 따르겠다고 하는 이 사람을

내가 마다할 리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과연 이 서기관이 이 뜻을 알까?

나를 따르는 길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안정”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를 따르는 길이

세상의 성공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면

포기해라.

내가 가는 곳은

네가 그리고 있는 길과 전혀 다르다.


그런데 제자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한다.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게 해 주세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우선 해야 할 일은

나를 따르는 일이다.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겨라.”


사람이 살아갈 때,

죽음 이후의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다윗을 기억하느냐?”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도했는가?


그러나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다윗은 그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다윗은 살아있는 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이 아닌

죽은 자의 일로 인하여 심각해 하는가?


세상에는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들이 많다.


이제 이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생명을 주러왔다.

내가 할 일은 살리는 일이다.

죽은 자는

단지 죽은 자의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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