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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과 만남(1)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예수 스토리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1>

내가 살아가는 삶은

길을 걷는 것이요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 길은 안되요!”라고 하여도

나는 그 길을 걷는다.


“그곳에는 길이 없어요!”라고 하면

나는 길을 만들어 간다.

내가 바로

그 길(The Way)이기 때문이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 땅을 밟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말로는

우리는 하나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나뉘어 살아가는 것을

즐긴다.


유대가 되었든,

갈릴리이든 그리고 사마리아 땅이든

모두 하나의 이스라엘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둘로 나뉘었고,

다시 하나될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의롭다.”라는

자의식(自意識)이 매우 강하다.

여기까지 참 좋다.


그런데

“사마리아 땅,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정(不浄)하다.”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할까?


나는 사마리아 땅을 밟았다.

동네 이름은 “수가(συχαρ)”이다.

그런데 이곳에

야곱의 우물

(Jacob's well,

πηγη του ιακωβ)이 있다.


야곱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곳은 유대땅이 아니다.


어느덧 낮 12시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정오(正午)는

가장 뜨거운 시간이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가장 뜨거운 열을 내뿜는 시간이다.


오직 두 발로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이 시각은 나를 지치게 한다.


물로 목을 축이고

체온도 낮추어야 하는 때.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오고 있다.


빈 몸으로 다니기에도 지치는 이 시각,

여인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음을 재촉한다.

결코 가벼운 걸음이 아니다.

올 때는

물동이가 비어있겠지만,

갈 때에는

물이 가득 찬 물동이가 될텐데.


“터덕, 터—덕”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이 시간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생각에

여인을 물을 길러 온 것이다.


마침 함께 했던 동역자들은

물건을 사러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여인과 단 둘이다.

나는 여인에게 부탁했다.

내가 목이 마릅니다.

혹 마실 물을 줄 수 있나요?


어려운 부탁인가?

그러나

여인이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이 상황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 옳은가?

단지 목마른 자에게

물 한잔 주는 일에도

사람 사이의 갈등과 벽이

두텁게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2>

물을 마실 수 있나요?”라는

정중한 부탁에

여인의 반응은

생소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의 반응은

젊은 남자가 부탁했을 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식은 아니었다.

대 낮에

웬 남자가 나에게 추근거립니까?

우물에 물이 있는데 알아서 마시지.”

이런 식이었다면,

그래도 남녀 사이에 생길 법한

다정한 모습이 아닌가?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어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나요?”


이 대답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유대인인 내가

사마리아 땅에 있을 수 있는 것 만큼,

그대도 유대인 여자일 수 있지 않은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본래 생김새나 피부색이

완연히 다른 뿌리를 가진 것도 아니지요.

얼핏 보고 나에게 유대인, 사마리아인으로 구분하여

그리 대답하십니까?’

나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진정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이 먼저 내게 구했을것이오.

그랬다면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겠지요.”


인종 간의 갈등에서

물로 대화의 초점을 바꾸었다.

그녀는

나의 노력에 쉽게 동화되었다.

여기 물을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내게

물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우리에게 물을 주셨고

우리도 대대로 이곳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야곱보다 위대한 분입니까?”

비록 여인은

눈에 보이는 물에 집중했지만,

순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공통조상인

야곱을 거론하면서

나와의 뿌리를 조심스럽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인에게 대답했다.

이 우물에서 주는 물은

마시는 자는

즉시 목이 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이런 물이 아닙니다.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여인의 눈동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단어에 동공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 샘물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3>

여인은 나에게 요청한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녀는

나를 “주인(κυριος)”라고 부른다.

목이 마르지 않는 물을

요청한다.


이제 여인과 보다

깊은 나눔의 교제를 해야 한다.

여인이여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


나는 이 여인을 잘 알고 있다.

이 여인에게는 데리고 올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여인이 진실해야 할텐데.

여인은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파노라마와 같이 스쳐지가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듯하다.

이윽고 여인은 대답한다.

나에게는

남편이란 존재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허무함(futility)으로 가득찼다.


나는 여인의 삶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진실하게 대답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대에게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습니다.

당신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당신 남편이 아니지요.

그러니 당신의 대답이 참됩니다.”

여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속으로 말한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구이길래

나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인가?

선지자인가?”

여인은 매우 당황했다.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운이 없는 상태로 말한다..

주님.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군요.”

여인은 이제 본론으로 대화를 전개한다.


여인이 갖고 있는 바램과

그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욕구에 대하여 푸념하듯이 내뱉는다.

우리 조상들은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유대인 당신들은

예배할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영적인 바램(Spritual Desire)을 가지고 있음을

이런 말로 표현한다.

항상 그랬다.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는 분(Omnipresence),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자신들이 정한 장소(One spot)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솔로몬이

우리를 위하여 성전을 지었지.

그때 우리는

솔로몬에게 분명히 가르쳤다.

우리(神)는 사람들이 만든

건물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영원한 존재인 우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제한하려고 달려든다.


나는 여인에게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인이여 지금부터

내가 하는 내말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당신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입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합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 바로 지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장소(place)”가 아니라

때와 시간(Time)”과 연결된다.


무엇보다 마음과 뜻,

의지 그리고 생각이

모두 하나님께 집중되는 그 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예배자를 찾고 있다.

지금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대를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여인은 내가 하는 말을

쉽게 알아차렸다.

나를 고소하고 죽이려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나 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과

여인은 완전이 달랐다.


여인은 나에게 말한다.

저도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여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에게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여인이 확실한 믿음 가운데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인 남자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 가르쳤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나를 소개했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직설적으로나를 소개했다.


내가

그대가 기다리는

메시아( מָשִׁיחַ)

곧 그리스도(Χριστό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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