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여(所與)와 책임(責任)의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소여(所與)란 무엇일까?

이는 나의 노력, 수고, 땀흘림 없이

"주어진 것"을 가리킨다.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先驗的)인 것
즉 경험 이전에 주어진 것은
"시간(時間.Zeit, Time)"과
"공간(空間,Raum,Space)" 이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은 소여의 하나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시기, 장소, 상태

그리고 조건은 나의 선택과 무관하다.


태어나서 살아갈 때

조성된 환경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전적으로 부모에 의한 것일까?

부모에게 물어보라.

세상의 어떤 부모가

"그래 내가 원했던거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Of course not!!!!)


이제 세상에 태어났다.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알고보니 주어진 것이 또 있구나.

"외모. 아이큐, 재능, 형제자매 관계,

친척 등 인간관계 등"


이런 어마어마한 소여를 바탕으로

우리는 삶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보면
부모의 수고가 있었지만
나의 의지와 수고가 동반되지 않은
것은 바로 "나의 출생"이다.
동시에 "나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소여와 소여 사이에
놓여진 나의 삶, 생애는
나의 노력의 결과일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만의 수고, 노력의 결과일까?"

그렇다고 해야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겠지.

그런데 종종
"운칠기삼(運七技三)" 이란
말이 있다.

이는 수고가 동반되지만
수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運)"의 영향력
다시 말하면
수고 외의 변수가 더 크다는
의미이다.

"태어나길 잘 태어나야 해"
"유전인자가 더 중요해"
"무엇을 갖고 태어났느냐
선천적인 것이 무엇이냐?"
이런 말들을 100%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할지라도.


그것이 인생이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를
설명한 것이다.


어차피 출생부터 불평등했다.

소여의 기준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하게

"평등(平等,Equality)"를 희구한다.


절대적 평등, 상대적 평등은

구호에 불과하다.

형식적 평등(기회의 평등)

실질적 평등(분배의 평등, 결과의 평등)도

불가능하다

수직적 평등, 수평적 평등 역시

용어는 존재하지만 내용은 빈곤하다.


과연 인간은 평등을 원할까?

다같이 잘 사는 것을 바랄까?

나만의 행복을 원할까?

내가 먼저 행복하고

그 다음은 다음일 뿐이아닐까?


소여 이미 주어진 것의 불평등을

극복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0.001%를 제외하고는.


이제 평등은 부르짖거나

평등에 매달리거나 매몰되지 말자.

소여(所與)와 소여(所與)사이에서.

이는
"나만의 노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일구어냈다."고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다.

단 각자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는

구조는 만들어보자.

그리고 그 결과는 맡기자.


다만 최선을 다한 결과가 어떻든

감사하고 받아들이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목발을 짚은 나는

일찍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일을

포기했다.


단 자족(自足)의 길을 걸어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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