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만에 다시 극적으로 만나다.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절.
막연하게 대학을 가겠다고
준비하던 신학교 4학년 때
삼수(三修)를 하던 한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저 오빠를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일방적이었다.
그녀에게
나의 의사(意思)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서실에서 잠간 휴식을 취할 때,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할 때,
그리고 집으로 갈 때
그녀는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하철에 올라타면
그녀는
문이 열리는 모서리에 서 있었고
나는 목발을 짚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에겐 오빠가 셋 있어요.
다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빠도
그에 못지않은 대학에
꼭 입학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나름대로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일정한 대안까지 제시해 놓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내게.
그녀가 나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내가
그녀보다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나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다는 까닭이다.
그녀는 나의 기억 속에 있었지만
마음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예뻤다.
그녀는 착했다.
그러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학력고사를 치루기 20일 전
나는 그녀에게 통보를 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어.
그대에게 맞는 대상을 찾길."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아니 내가 떠났다.
그리고 삼십년이 훌쩍 지난 어느날.
내가 일하던 직장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어... 이러시면 안되요.
어...이분이 만나시겠다고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네요."
"누구?"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쉽게 알아채릴 수 있었다.
"아니? 그대가어떻게 이곳에까지"
그녀의 손에는
보름달덩어리 같은 커다란 수박 두개가
양손에 들려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고...
어떻게 내가 여기있는지
알고 찾아 오셨는지
자초지종을 들어봅시다."
직원은 나에게 말한다.
"방금 택시를 타고 문 앞에서 내리셨어요."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는듯 했다.
"잘 계셨죠? 아니 잘 계신 것 같아요.
어느날 모 신문에서
오빠가 쓴 글과 사진을 보았어요.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올랐어요."
나는 중년이 된 그녀를 보았다.
잘 차려입었을까?
방금 택시에서 내려 양손에 수박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
"무엇을 마실래요?"
나는 이제사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시원한 hot coffee 요.
아니 아아...가능할까요?"
자세히 살표보니
오십대 중반인 그녀의 얼굴에서
이십대 초반의 모습이
서서히 보여지기 시작했다.
"저 잘 살고 있어요.
다만 오빠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제 되었어요.
안심이 되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술술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기사에서 오빠 얼굴을 보고
확인하고 싶어서
경기도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이곳까지 와달라고 해서
왕복비용 지불하고 온 거에요."
사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그녀가 보고싶기는 했다.
나를 좋아했던 그녀를
나의 기억 속에서
완전하게 지울 수는 없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길고 긴 시간동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것.
약삼십분이 지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께요. 저.
이제 오빠 얼굴 보았으니."
몇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나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서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나서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김팅장님. 전철역까지 잘 모셔드리세요."
내가 한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김팅장님이 돌아와서 나에게 말한다.
"잘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데 원장님 젊으셨을 때
잘 생기셨다고 그분이 말씀하시던데요."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돌풍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그녀.
"잘 지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