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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도 주문도 못하고

동대문 야구장 근처 다방에서

고3때였다.

문학서클 "샘" 회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S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한 2년 선배가

나를 보자고 연락했다.

장소는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

근처에 있는 다방(茶房)이었다.


삼월이니까 검정색 교복을 입었다.

사실 교복 이외에 다른 옷도 없었다.

나는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다.

고등학생은

다방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낯설고 겸연쩍은 풍경이 눈 앞에 전개되었다.

나는 다방 가운데 빈 자리에 앉았다.


'2시약속이니까 10분만 기다리면 되겠지.'

자리에 앉으니까

누나뻘인 예쁜 아가씨가

나에게 다가와 따뜻한 물

(당시 엽차(葉茶)라고 했다.)을

한 잔 테이블 위에 놓는다.

나는 태연한 듯 말했다.


"선배가 오시기로 해서요.

"그럼 주문은 선배가 오시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로 답했다.

커피숍에서 PHOTO by R.G.Y

10분이 지났다.

다방 벽에 걸려있는 시계바늘이

2시를 가리켰다.

나는 손님들이 들락날락 하는 입구를

주목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을 뻔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

나는 그분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내 주머니에는

집으로 가기 위해 남겨둔

학생용 버스표 두장만이

바지 주머니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2시 10분.

시간의 흐름은 더뎌지기 시작했다.

10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입구를 바라보는 내 눈은

충혈된 듯 했다.

"왜 안오시지?"


이 때 "주문은?"하고

아가씨가 다가와 내게 묻는다.

나는 엉겁결에

"아직 선배가..."라고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더 기다려야 하지요?"라고 묻고는

카운터로 돌아가는 아가씨 뒷모습을 보니

진땀이 교복 안으로 흐른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엽차(葉茶)를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한 모금도 들이키지 못했다.

선배가 오지 않으면

엽차 값을 달라고 할까봐.

주머니 사정이 좋지않은 나에게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그러던 중 삼십분이 흘러가버렸다.

그야말로 좌불안석(座不安席)이었다.

머리 속은 혼돈으로 가득하고

왼손은 버스티켓(회수권) 두장만 있는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늦어도 너무 늦네."


다른 테이블 주변으로 오고가는 손님을

반갑게 응대(應對)하는 아가씨 눈빛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기다리는 동안 엽차 마셔도 되요."


아니 내 마음을 읽으셨다는 말인가?

나는 주저주저하면서

다시 입구(入口)를 바라보았다.


45분쯤 되었을 때

나는 결심해야 했다.

"선배가 오지않는 것이 분명해.

아가씨 시선을 피해서 다방을 나서야지."


나는 기회를 포착하기로 했다.

이제는 아가씨가

나를 쳐다보지 않는 그 틈을

나는 잡아 다방을 떠나기로 했다.

문제는 그 틈을 잡았다고 해도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이.


그래도 선배가 오지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되었기어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드디어 나는 작전을 행동으로 옮겼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처럼

나는 아주 신속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방 문 밖으로 나왔다.

내 뒤에서

"엽차값은 내고 나가야지요?"하는

아가씨의 목소리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얼마나 큰 중압감이 나를 억눌렀는지 모른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바깥으로 나오니

옆에 "계림극장(溪林劇場)"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다음날,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나는 황당했다.


알고보니 약속한 날자보다 하루 전날

내가 다방에 가 있었던 것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다방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내가.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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