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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2)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는 창경원에 가셔서

휴식과 즐거움을 취하려는 손님들

소풍을 온 학생들

가족여행을 온 사람들

무엇보다 벚꽃놀이가 한창일 때

그 흥취(興吹)를 만끽하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순간의 장면을 담아한 장의 사진을

드리는는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다.

아버지 수입은 들쑥날쑥했다.

그런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9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느라고 별의별 장사를 다 했다.


전쟁 이후에 가능한 사람들의 삶

특히 고향을 잃어버린 절의 삶은

대부분 비슷했다.

여러분 중에 우리 집에는 심각한 일이 생겼다.

전란 중에 셋째로 태어난 큰아들이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다행이다.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모습을 멈췄지만 충격적인 일이었다.

순경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섯 번째로 태어난 막내 아들

그의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건강했다.

그러나 어느 날 막내 아들은

하반신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하루 사이로 명명을 하던 아버지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아버지에게

저희 아들이 수학 모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온 아버지

전쟁으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갔다

우연히 부산에서 가족들이 다시 만나

용산 한귀퉁이에 있는

적산가옥인 일본유곽에 거처를 옮기고

삶을 시작하려던 아버지.


그나마 이남삼녀(二男三女)의 자녀가

삶의 목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아들이 소아마비를 앓게 된 사건은

아버지에게 더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우울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1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은 어머니를 우리 품에서 데려가셨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큰 누나와 둘째 누나가 출가한 뒤였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취업을 하여 수원에서 혼자 생활을 시작했다.

남사랑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누나와 나만 남았다.


누나는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누나가 낮에 공장에서 본 수입의 일부로

나는 학교 수업료의 일부를 충당했다.

나는 번번히 수업도중에

학교에서 집으로 와야했다.

그 이유는 수업료를 제때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집에 가봐야 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지만

학교의 방침이라 우리를 집으로 보내는 일을

울며겨자먹기로 실행에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백수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장애인"이란 용어조차 없었던 시절

관련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어떤 조치도

국가는 마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장애자녀를 둔 부모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점보 빌리지에서 PHOTO by R.G.Y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를 시설에 맡기는 것이지만

법률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맡길 시설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장애자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부모들은

용기가 있었다.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할 수 있는 그것 뿐이었다.

물론 그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있는

가치의 일이었지만.


어느날.

아버지는 무심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나는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나찌의 가스독살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살아남은 무명인(無名人)의

총기(聰氣)잃은 독백이 기억난다.

"가족도 잃었습니다. 친구도 떠났습니다.

이웃도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마을 사람들도 모두 생명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숱한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혼자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단순히 살아나으려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버지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TV전자학원을 졸업하고

집에서 뒹굴고 있는 막내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 하지 않았다.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니?"

"너는 꿈도 목표도 없니?"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는지

아니 할 수 없었는지.


장애자녀를 기르는 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상복(喪服)을 입고

태양이 내리쬐는 도로 위를

삼보일배(參步一拜)하며 걷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제단 위에 누이고

칼을 들어 제물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에는

순종이라는 결의(決意)를 보였지만

아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외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고초를 겪고

십자가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마지막 한 숨을 내뱉을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야만 죄지은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처절함이..


나의 아버지도 동일하지 않았지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너를 위해."


마치 무능해보이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내모습이 똑같다.

자녀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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