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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1)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첫돌이 지나자 가슴에 묻었다.

사람들이 기억하기에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둘이었다.

요란하고 끔찍한 한국전쟁이 끝났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시작하기도 전에

공산당(共産黨)이 싫어서

황해도 사리원(黃海道 沙里院)을 떠나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어린 두 딸과 함께.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찾아 능곡(陵谷)에

임시로 자리를 잡아서 아들을 낳았지만

이북(以北) 공산당이 남침(南侵)하여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땅 남쪽 끝인 부산(釜山)으로

피난(避難)을 가야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또하나의 생명 딸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솔(食率)들을 이끌고

다시 북상(北上)해야 했다.

고항을 떠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失鄕民)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정처(停處)없이 떠돌다 전쟁통에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일본유곽(日本遊郭)인

용산의 적산가옥(敵産假屋)에 짐을 풀었다.

몇년 후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아수라장이었다.

나라살림은 엉망이었다.

나라가 둘로 나뉘자마자

북에는 공산당이 자리를 잡았지만

남은 자유(自由)라는 이름으로 혼란이 가득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유주의자

공산당, 일제잔당, 재건주의자,

곧 북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희망을 가진

실향민들,

그리고 깨어있지 않은 민중들이 섞여있었다.


나라가 이러니 교육, 경제, 정치, 의료, 직업 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는 것은 요원했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실향민들은

이북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단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돌이킬 수 있는 변고(變苦)가 발행했다.

남은 두아들이 소아마비(polio)가 발병했다.

사실 소아마비 (小兒痲痺)란 명칭이 말하듯이

어린 자녀의 신체가 움직일 수 없는 증세가

나타났다는 의미 이외에 그 어떤 설명도

주어지지 않은 비극이 두 아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공산당으로 인한 실향(失鄕)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避難)

정처없는 떠돌이 가족

이것도 모자라 두아들에게 나타난 소아마비.

더이상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이

또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살이가 다 귀찮아졌다.

무슨 희망이 남아 있을까?

게다가 전쟁 중에 만난 두명의 조카들이

혹처럼 붙어 아홉식구가 되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철도청 공무원이었다, 일제시대 하에서

철도청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듣기에는 A 과목을 통과해야

B과목 시험을 볼 자격을 주고

또 B 과목을 통과해야

C과목 시험을 볼 자격을 준다고 했다.

특히 한국사람에게는 더 까다로웠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버지는 철도청 공무원이 되었다.

매번 기차를 관리하며

기차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들을

우리에게 용맹 삼아 들려주곤 했다.


아버지에게 철도청에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북한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철도청에 합류하게 된 까닭이라.

아버지 성실함을 눈여겨보았던 그분은

철도청에서 사람을 구하니

같이 일하자고 요청을 했다.


생계도 막연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때 이런 요청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철도청에서 근무할 때

제 시간에 출근하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이

싫었도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홉식구를 책임지려면

안정된 직업이 있어야 되지 않은가?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일은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지금은 창경궁이라 했지만

당시에는 일제시대가 정한

창경원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려고 했다.

창경원에 놀러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사진을 찍고 일종의 비용을 받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버지가 철도청에서 일하기를

굉장히 원했던 것 같았다.

월급도 나오고 기차도 공짜로 타고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가족들의 이런 바램을 단칼에 거절하고

사진기를 매고 창경원으로 출근했다.

잠시 사진기는 오늘의 카메라와 다르다.

길고 긴 삼발이를 세워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영상을 흡입하는 것이다.

글/사진 홍중식 기자/free74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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