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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3)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와 나와의 나이 차이는

42살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강산이 4번이나 변했다.

아버지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시절,

내가 상상으로만 그려야 했던

험난한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오셨다.

게다가 전쟁후에도 상상조차 하지않았던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제삼자적 관점에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이념(理念)의 차이로 인해

약간의 갈등이 있기는 했었다.

아버지에게는 일본 그 이상으로

공산당에 대한 반감(反感)이 더 컸다.

추측하건대 일본치하에서는

직업도 가졌고 가족끼리 함께 살았지만

공산치하에서는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고로 국내에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듯한 세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런 이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초월한 듯한 자세를 보였다.


반면에 정작 관심을 집중해야 할

소아마비로 미래가 불투명한

막내아들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셨다.


어느날 이러한 무관심(unconcern)이

나에게는 냉소적(cynical)인 것으로 보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서

무능력(inability)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느날 나는 아버지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집에서 백수로 놀고 있는

장애를 겪는 막내 아들을..

"그 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두아들의 다리가 건강했을텐데.

그러면 지금 내 처지가 달랐을텐데."

가끔 먼하늘을 바라보면서

정처없이 흘러가는 구름 위에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싣고

이리저리 다니고 싶은 표정을 보였다.


이시돌 목장에서 PHOTO by R.G.Y

사진기를 들고 창경원에서

새롭게 개장한 과천 대공원으로

직장을 옮기셨을 때에도

아버지는 우리들 등록금 마련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대해

한번도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앞으로 너는 무엇을 할 생각이니?"


나이로 인해 손에서

사진기를 놓을 수 밖에 없었을 때

지금의 전자랜드 자리에 있었던

용산청과도매시장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거나

감귤을 받아서 작은 소매가게를 운영할 때,

부동산 소개업을 개설하고 지낼 때에도

아들의 삶을 책임져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보다는

"나의 소일거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혼은 안 하니?"

흔하디 흔한 이 질문조차도

내겐 던지지 않았다.


"내가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막내는 내가 데리고 있을꺼야.

그 다음은.."

아버지 생각은 이와같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전세(專貰)나 월세(月貰)는 미친 짓이야."라고

누누히 말씀하셨다.


아주 작은 집(不動産)이었지만

이것만큼 지켜야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이 신념은 나이 구십(九十)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변함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어느날,

둘째 아이를 낳고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네가 더 잘 하고 있잖아."

아버지가 하신 한마디 말씀.


나는 이렇게 들었다.

"더이상

내가 해 줄 것이 없어."


아버지의 마음은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했다.


그랬다.

사실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너무 다르다.

너무 많이 변했다.


돌이켜보건대

어느새 나도 아버지의 마음과 같음을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 삶이

나의 자녀가 살아갈 삶과 다르다.

농경사회(農耕社會)라면

자손대대로 전수(傳授)할 것이 있겠지만

오늘은 산업사회도 아닌

정보사회를 지나고 있다.

그래서그런지 나 또한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너 스스로 잘 해라."


아버지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같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도 철이 들기 시작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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