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 후로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편지 아닌 편지를 매주 보냈다.
나의 설교가 담긴 주보를
매주 보냈다.
이 주보에는
예배순서와 광고만이 담긴
일반 교회주보와는 달랐다.
주보에는 나의 설교요약,
학생들의 산문(고등부를 지도하니까)이 담긴
당시 마스터(master) 인쇄를 통해 나온
A3짜리 커다란 문서형태였다.
이 주보(週報)를 그녀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군대를 간 후배와 제자들에게도
내 사비(私費)를 들여서 우편으로
매주 4~50명에게 보냈는데
그 안에 그녀에게 보낸 주보가 포함되었다.
그녀가 헤어지면서 내게 준 주소로
이 주보는 매주 보내졌다.
가끔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후배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매주 형님께서 보내주신
주보를 만나는 것이
군 생활에서 기다림이라는
또다른 희망을 제게 주었습니다."
지금 SNS로 툭 던져진 서류보다
우체통에 보관된 우편이
받는 이에게는 작은 기다림이 되었다는 것은
아날로그 방식의 정감(情感)이
아니었을까?
나는 매주 우체통에 이 주보를 넣으면서
작은 사랑을 담았다.
그런데 약 7개월 쯤 지났을 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이
당시 어떤 여성으로 부터 받은 편지가
뇌리를 스쳐갔다.
편지에 !를 보냈더니 ?로 회신이 오고
다음 , 으로 보냈더니 . 으로 돌아왔다는.
나는 그녀에게 두터운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주보를 담지 않았다.
단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하얀 A4 용지를 다섯장을 접어서
편지봉투에 넣어서 보냈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생각은
궁금증과 관심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후배는 나에 대해 그녀에게
어느 정도 소개했을터,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여전히 나는 결혼이라든가
연애(戀愛)라는 단어가 나의 처지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 서른에 대학을 다니고 있는 만학도(晩學徒)
게다가 아직 미래도 불투명한 나.
동시에 미래에 대해 확신도 없고
목발을 짚고 사는 젊은이의 앞날에 대한
정부의 복지대책도 없었던 그 때.
나에게 여자는 무의미했다.
후배 결혼식장에서 뒷모습만 보고
흐릿한 다방 조명으로 잠시 만났던 그녀.
더이상 연락도 없는 그녀는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단지 수십통의 주보수신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거리는 민주화 투쟁으로
매일 시위와 데모가 지속되고
최루탄 냄새는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철학과로 복학(復學)하면
장학금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주일 고등부 예배가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도중에
교회간사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왔다.
"전화가 왔는데, 받으시라는데요?"
나는 급히 교회 사무실로 올라갔다.
목발을 짚은 나는 날렵하게
계단으로 올라갔다.
"주일날 교회로 나에게
전화연락할 사람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