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신촌역 근처 카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신촌역 광장이 어렴풋이 보이는
뷰(view)가 그럭저럭인 곳이다.
서울토박이인 나에게
연세대,이화여대, 서강대도 아닌
신촌역 근방은 처음이다.
지금은 신촌역사가 크게 지어졌지만
1980년대 말은
그저 지나가다 정차하는
간이역 같이 아담하게 지어진 역사가
당시 도시 속 고전적 풍미를
내보이곤 했다.
그래 이 근방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이 역을 주로 이용했겠구나.
나는 바깥이 훤히 보이는
창가(窓街)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그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기차를 이용하는 그녀는
기차가 연착하지 않는 한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동대문 다방보다 훨씬 밝은 카페.
이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단아한 원피스에
긴 지갑을 손에 들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엷은 미소를 띠며 작은 목례를 하며
내가 앉은 자리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나도 밝게 웃으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도 들릴까 말까 하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내가 앉아있는 앞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먼저 차를 주문하시지요!
제가 보낸 주보는 잘 받고 계시지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느라고 정적이 흘렀다.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주일 예배가 일부 끝났는데
전화를 주셔서.
교회로 나를 찾는 전화를 주신 분은 ...
그쪽이 처음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도울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아직 호흡을 정리하는 느낌이었다.
"빈 종이만 잔뜩 편지봉투에 넣어서
제게 보낸 의도가 무엇인가요?
주보가 매주 도착하다가
두툼한 편지가 도착했어요
때를 맞추어 이웃에 살고 있는 동생들이
집에 와 있었어요.
걔들이 자꾸 편지를
개봉하라고 재촉해서
편지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세상에!!!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빈종이만 가득 채워져있기에
우리 모두 뜨악했지요."
나는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으로 차분하게
전하는 말을 들으며 웃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 담겨있길 바랬나요?'
나는 즉각적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나의 되물음에 살짝 당황한 듯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동생들과 그 긴 편지를
다 읽으셨다고요?
무엇이 담겨있었나요?
아니 동생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실망하던가요? 아니면 ..."
"길다고요?
아무것도....
동생들과 저는
모두 어이가 없었지요!"
"그러면 그 내용을 알고 싶어서
주일날 다급하게 전화를 주셨군요."
나는 전화를 내게 준 이유를 알고 싶다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글쎄... 그게.."
나도 커피를 한 모금을
입안으로 넣었다.
"저를 많이 생각하셨던 것 같네요.
제가 할 말은
그 흰 종이에 다 담았습니다.
혹시 더 궁금하시면
다시 연락주세요.
교회가 아니라 집으로.
저는 학교를 다니고 있기에
저녁시간에만 통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했다.
"뭐 이런 남자가 어디에 있나?
기차에서 내려와 이곳까지
간신히 달려왔는데.
자기 말만 하고 자리를 일어서다니?"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아직 가뿐 호흡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내가 카페 문을 막 나서려는 순간.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오빠 오누이 하자면서요?
이렇게 나가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던지는
그녀의 말에 잠간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돌아앉아야 했다.
"하긴 멀리서 오셨는데
이렇게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이렇게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