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식이 몸을 떠나던 그 날

내 의식은 어떠할까?

노화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떠날 날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떠난다(pass away).'표현보다 '내 의식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라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어로

죽음은 "Heimgehen 즉 집으로 돌아가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국에서도 유교나 불교는 '돌아가시다'의 의미가 있고 기독교는 '소천하다, 돌아가다.'의 뜻을 품는다.


물리학에서는 인간은 단지 물질이기에 죽음은 물질의 해체로만 설명된다. 여기에서 "의식(consciousness)" 또는 "정신(mentality)" 와 영혼(soul or spirit)"은 비물질적이라기 보다는 물질 다시말하면 호르몬 작용 정도로만 보기에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이며 실체일까?

오래 전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내 곁에서 주무실 때, 그 때가 기억난다.

구십에 내 곁을 떠나신 아버지. 그때는 팔십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버지께서 내 곁을 떠나게 된다면..."이란 두려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죽음이란?' 질문이 신학적이고 철학적일 뿐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질문을 나자신에게 했었다.

이런 질문을 더욱 실질적으로 제기하게 된 계기는 주무시던 아버지의 수면무호흡증 (睡眠無呼吸症, sleep apnoea/sleep apnea syndrome) 때문이었다.


곁에서 주무시던 아버지의 호흡이 잠시 멈추었다. 그 잠시(暫時)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관적이지만 꽤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푸 후~~~"하며 내뱉어지는 호흡으로 인해 나는 순간마다 삶의 절벽, 특히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수면무호흡증이 단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었는데, '아버지는 본래 그래.'하고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오히려 '어느 호흡이 마지막 순간이 될까?'하며 나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어느날 지인과 함께 잠을 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 분은 파킨슨병(Parkinson Disease)으로 인해 장기간 고생하고 계셨다. 언젠가 이분과 적어도 하루는 잠자리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침 기회가 왔다. 그분도 그분의 식구도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그분의 발끝에서 잠을 청했다. 물론 잠이 들기 전까지 간단하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이땅에서 그분이 마지막 호흡을 했던 날이었다. 새벽쯤이었다. 그분은 살짝 몸을 미세하게 움찔했다. 기억하기로는 두어번 정도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 다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분은 "푸~~~~~후~~~~"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것이 마지막 호흡이었다. 한 인간의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을 바로 곁에서 직접 목도한 것이다.


이제 나는 칠십(70, 七十)이라는 숫자를 내 몸으로 겪는다. 과거에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도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길고긴 생이다. 오늘 초고령화시대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어린 나이일지 모르지만. 사실 미국식 나이계산에 나는 반대한다. 어머니 자궁에서 잉태하는 순간부터 나의 생은 시작되었다. 따라서 출생순간부터 '한살'로 계산하는 법은 성서적이고 옳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칠십년이나 살았는데, 이런 주문을 받는다. "건강하기 위해서 음식에 절제, 적절한 운동을 해야해." 주변을 돌아보면 칠팔십에 치열하게 운동에 몰입하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먹고싶은 것 마음놓고 먹다가 떠나는 것이 옳지않은가? 왜 아직도 장수(長壽)를 꿈꾸는가? 이미 장수했는데."라고..


이 나이에 하루하루 초침(秒針)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동안 만났던 죽음을 직면(直面, confrontation)하려고 한다. 특히 "What is the death?"라는 질문을 타자(他者)가 아닌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어느날 나에게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침대 위에 나는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 둘 중 하나이리라. 곁에 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내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임사체험자(臨死體驗者) 들의 말처럼, 나의 자의식(Self consciousness) 또는 나의 영혼(soul or spirit)이 나의 육체를 떠나 나의 육체를 관조하는 위치에 서 있게될까? 아니면 물리학자의 확신과 같이 마지막 호흡과 함께 작동이 멈추고 의식도 사라지고 없어지는가?

이 둘 중 어느 것이 좋은가 혹은 바람직한가는 내 소관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후자이어도 좋다. 무(無. Nothing, Nihilo)에서 시작해서 그리로 가는 것도 좋다고. 다만. 전자라고 했을 때, 즉음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생(生)으로 이어진다면 어떠할까? 이때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면 담담하게 맞이해야 하는가? 혹 다른 생이 전개될 때, 그 생의 상태가 천국이든 지옥이든 간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죽음조차 편하게 맞이할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이를 생각하지 않고 내 생이 자식의 생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자식의 생을 통해 내가 살아간다고 착각하니까 재산을 상속시켜주려고 애쓰는 어리석음을 본다. 자신의 죽음이 결코 자식을 통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죽음은 어떠한 것일까?


나는 사십에 들어설 때부터 "나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떠벌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지금에 와서 '나의 생은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살아간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궁금하다. 자연스럽게 호흡이 멈추는 순간, 의식작용 아니 의식활동도 멈추게 되는지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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