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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12. 2022

하이힐을 버렸다

내 젊은 날의 추억


여름에 신는 12센티 힐은 나의 보물이었다.
키가 겨우 160이 될까 싶은 나에게 키를 커 보이게 하는 구두는 나의 몇 안 되는 무기와도 같았다.
무더운 여름이라서 보통 짧은 하의를 입으면 힐 전체가 적나라하게 다 보이는 때가 허다하지만, 때로는 바지 길이를 조금 길게 해서 살짝 굽을 가리게 코디하면 단신인 나도 7등신이 되게 만들어 주었고, 무엇보다 옷맵시가 살았다.


그렇게 높은 신발은 발 건강에 굉장히 안 좋대~
그거 신다가 발 삐끗하기라도 하면 평생 고생한다~?!


주변 반응은 모두 걱정 어린 시선이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주야장천 신고 다녔다.
미세먼지며 오염된 공기가 잔뜩 아래에 쌓인 느낌이었는데 하이힐을 신으면 윗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더라.






7센티는 기본이고 12센티를 마음먹고 산 적이 있었다.


그 샌들은 신는다기보다 계단에 오르듯 신발에 올라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난 우아하게 걸었다. 마치 모델이라도 된 것 마냥.


또각또각 걸음소리가 경쾌하게 나면 세상이 리드미컬하게 변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이젠 신을 수가 없다.




안 신은지는 꽤 오래되었다.


뱃속에 소중한 아이가 있을 때부터였다.


2층 빌라에서 시작한 남편과 나는 계단이 다소 높아 2층이지만 3층 같은 집이라 어머님의 조언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혹시라도 발을 잘 못 디디면 큰일 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배가 불러오고 아이를 낳고 유모차를 밀고...


당연히 힐은 신을 수가 없었다. "아기 엄마가 무슨 힐이야"라는 주변의 시선은 둘째 치고라도 아기띠를 하고 아기를 안고 가다가 힐 신은 내 발이 잠시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아...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이다.



그런 이유로 나의 보물과도 같은 하이힐은 신발장에서 쿨쿨 기약 없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래간만에 외출을 한다고 신발장을 열었다가 매우 반가웠다.

옛날 생각도 나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하지만 높고 빨간 그 구두를 꺼낼 수는 없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 구두는 안 될 일이다.


운동화를 신기는 또 기분이 그렇다. 그래서 그 옆에 무난한 메리제인 구두를 꺼내 들었다. 높이는 약 5센티.




그런데 10여 년 동안 운동화를 신고 다닌 탓에 어제 고작 저걸 신었다고 다리가 좀 아프다.


20대 때에는 발 뒤꿈치가 까져서 밴드를 붙이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힐을 고수했었는데.


정말 그땐 그 높은 걸 어떻게 신고 다녔었지?


운동화는 아예 없다시피 한 나는 거의 매일 힐을 신고 다녔는데 그래도 그다음 날 후유증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세월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니.



빨갛고도 높디높은 하이힐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한다.


어차피 신을 수도 없으니 버리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갈등이 생길까.


나도 세월에 이제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텐데 말이다.


버리지 말고 딱 그 한 개만 남겨놓을까?


내 젊은 날의 추억이 아로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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