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Jan 09. 2023

방구석 파티셰의 졸업 선언

벌써 그리운 빵내음

"삑 삑 삑삑. 띠리릭"



한 달에 한 번씩은 토요일에도 근무가 있는 남편이 4시쯤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토요일이라 학교를 안 가는 아이들과 지내다가 그제야 화장실에서 늦은 양치를 하고 있던 나는 웅얼거리며 남편을 반겼다. 오늘 하루 오롯이 나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의무를 이제야 좀 덜은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하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에 온 이후부터 남편은 늘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살았다. 그 투박한 손으로 나 대신 조심조심 목욕까지 시켜 줄 정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딸바보, 아들바보였다. 특히나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너무나 예뻐해서 거의 하루 종일 딸아이를 안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오래 안아줘 버릇하면 아이가 손을 타서 당신이 회사에 가고 집에 없을 때는 손맛을 아는 아이가 혼자 누워 있으려 하지 않을 텐데, 그 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자꾸 안고 있는 거냐고 싫은 소리를 해도 배시시 웃기만 할 뿐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해주었다. 딱 한 가지, 아이 낳는 것만 빼고.



아이가 조금 더 커서 한글에 관심을 가질 때는 "기역~, 니은~, 디귿~ ..." 해가며 벽에 붙여 둔 한글 첫걸음 학습자료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꾸욱꾹 짚어가며 참 성실히 가르치기도 했다. 남편이 아이를 이렇게 좋아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아이들을 예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미혼 여성이면 보통 예쁜 아기를 보곤 너무 예뻐 죽겠다며 어쩔 줄 몰라들 하던데 난 시도 때도 없이 사이렌 울리듯 울어대는 아기들에게 희한하게도 정이 안 갔었다. 가정을 꾸리고 살면 행복하겠지 하고 막연히 짐작만 하였지 이런 내가 결혼을 할 줄도, 아이를 낳을 줄도 몰랐고, 벌써 내 키와 똑같은 딸아이가 있다는 것도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이토록 자상한 남편은 안타깝게도 어릴 적 아버지의 사랑은 받지 못하고 자랐다.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나 역시 사랑은커녕 시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단호한 어머님은 결혼하자마자 알게 된 남편의 여러 단점들과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성향으로 인해 그 옛날에 이미 이혼을 하셨고 아이들을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당신 아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하숙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더 잘 베풀 거라고 생각한 나는 결혼을 결심할 때 조금 주저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피는 못 속이는 아버님 자식인데 그 괴팍한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진 않았을까, 사랑을 받으며 크질 못했는데 나중에 세월 지나 자식이 생겼을 때 행여나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을 누가 말리랴. 꺼질 생각일랑 없는 불같은 사랑은 어느새 나를 결혼식장 주례선생님 앞에 데려다 놓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깨를 다 드러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를 보았다. 수많은 하객들의 눈동자가 모두 내게 고정되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결혼이란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닐 텐데. 이걸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가 둘이나 생긴 것이다. 딸만 둘이어도 혹은 아들만 둘이어도 다소 아쉬운 느낌인데 딸 하나 아들 하나는 200점짜리 엄마라는 주변의 부러움과 칭찬을 받으며 나는 뒤늦게나마 엄마라는 옷에 내 몸을 끼워 맞추었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서 또박또박 말을 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제법 얘기할 줄 알게 되면서 남편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입장에서 대화를 참 잘해주었다. 말수도 별로 없고 조용한 성격의 남자인데 참 의외의 모습을 나날이 보게 되었다. 남편과 10월 말에 만나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까지 거의 초고속으로 진행을 했어서 남편에 대해 아는 게 그러고 보니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는 게 없다는 건 연애를 오래 하고 결혼한 사람들에 비해 매일매일이 새롭고 재미난 구경거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다채로웠다.


조카에게 그림을 그려 주는데 캐릭터를 창의적으로 너무나 잘 그려서 만화가인줄!


어느 날은 요리를 해준다며 업소용 식용유 18L를 사 오고 튀김기를 이용해서 치킨을 해 주질 않나.


또 어떤 날은 스케이트를 타러 가자며 단 둘이 스케이트를 타러 가기도 했고,


나는 출근, 남편은 비번인 날은 나 몰래 밤을 구워 준다며 밤에 칼집 내는 걸 까먹고 그냥 가스레인지에 올린 바람에 폭죽 터지듯 터진 밤들 때문에 온 주방을 초토화시킨 귀욤미(?)를 보여주고 ~^^



심지어 빵까지 굽는 모습을!

작년 여름에 호기롭게 도전하여 빵을 만들더니 발효를 세 번이나 거쳐야 하는 식빵을 비롯해 호두파이며, 모카빵이며, 애플파이며, 정체 모를 빵이며, 빵이란 빵은 다 구워 주었다. 한동안 베란다에 내놓은 오븐에서 구수한 빵내음이 끊이질 않고 진동을 했다. 냄새를 빼려고 베란다문을 활짝 열어놓아 뜻밖의 구수한 냄새를 맡으신 윗집, 아랫집 가정에 이번 기회를 빌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남편이 직접 만든 빵> 제법 그럴듯하죠? ^^



각 빵의 용도에 맞게 꽤 많은 양의 박력분, 중력분으로 한동안 오븐이 쉴 틈도 없이 빵을 만들어 왔는데 어제 호떡을 마지막으로 밀가루 담은 통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 밀가루를 탈탈 털어가며 남편이 하는 말


"이제 빵은 졸업했습니다~"


"어! 이제 빵은 안 만들어?"


"응~ 이제 졸업하려구~"


하긴 그동안 만들어준 호두파이를 질리도록 먹었으니 이제 고만할 때도 된 듯하다.


여보 그동안 수고 많았어~ ^____^*


다음엔 


음~~ 


중식 어때? ^^ㅋ




매거진의 이전글 잘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