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발육에 매우 필요한 우유가 냉장고에 없는 날은 엄마로서 아이 성장에 관심이 없는 것만 같고 아이가 크든지 말든지 영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죄책감에 아이가 먹든 안 먹든 늘 냉장고에는 우유가 떨어지는 날이 없다.
1리터짜리 우유를 늘 사 오다가 엊그제 190밀리짜리 검은콩 두유 20개짜리 박스를 발견하곤
"오호~ 이거지."
하면서 집으로 가져왔었다. 1리터에 비해 거의 4배에 달하는 푸짐한 양일뿐 아니라 한 번 개봉하면 빨리 먹어 없애야 할 것 같은 1리터보다는 개별포장으로 되어 있으니 좀 더 신선할 거란 믿음도 있었다.
아이들만 칼슘을 섭취할 일은 아니지.
어른도 칼슘은 필요해.
내가 있어야 아이들이 있는 거지.
내가 없으면 이 생때같은 자식들 어디 가서 천덕꾸러기 되는 거지. 암만~
하는 마음에 나도 두유를 하나 꺼내 열심히 흔들고는 옆에 붙어 있는 빨대를 당겨 뜯는다. 어! 그런데 빨대 생김새가 매끈한 플라스틱이 아니다. 손가락에 힘을 주면 훅 구겨질 듯한 종이로 되어 있다.
"음. 그래도 환경에 신경을 쓰는 업체이군."
하며 빨대구멍에 꽂아 우유를 슉 빨아본다.
뭐 두유 맛은 다 비슷하다. 검은콩 두유 늘 먹었던 그 맛. 고소하면서 구수한 맛. :)
한 모금 빨고는 한 박자 쉬려고 입을 떼는데 윽. 빨대가 입술에 붙어서는 입술을 놔주지 않는다.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처럼.
냉동고에서 금방 꺼낸 얼음이 스치기만 해도 입술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게다가 감촉은 또 얼마나 생소한지.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음식 안에 잘못 들어간 종이조각이 입에 들어간 것처럼.
종이에 뭘 열심히 끄적거리다가 갑자기 생긴 호기심에 종이 한 장을 들어 입에 앙 물어본 것처럼.
영 촉감이 별로다.
계속 물고 있으면 그 별로인 맛과 눅눅함 때문에 금방 목구멍에 넘어간 두유 맛도 까먹을 지경이다.
떼잉...
별로야...
하는데 오늘의 날씨를 검색하던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오늘 영하 17도래!!"
"으응. 나도 봤어. 일주일 간 계속 그럴 거래..."
"우리 뭐 지금 남극이야?"
"남극도 이것보다는 안 추울걸?"
마침 검색해 본 남극 기온은 최저온도가 현재 영하 20도이다.
영하 17도나 영하 20도나 오십보백보이니
이쯤 되면 거의 남극체험과 다를 바가 없는데?!
네이버 주간 날씨 캡처
날씨는 점점 미쳐가는데
종이 빨대가 맛이 있니 없니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플라스틱의 시대라서 넘쳐나는 플라스틱으로 동물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직접적인 고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쉽게 쓰고 버려지는 방대한 플라스틱 때문에 후대 인류의 삶은 매우 힘들 거라는 기사도 본 적이 있다.
개체만 놓고 비교했을 때 플라스틱 빨대는 버려지는 다른 것에 비해 매우 적은 비율이라 큰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도 많은 비율은 폐그물이 크게 차지한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 법이고, 돼지저금통에 시나브로 넣은 동전들로 저금통을 들 때마다 그 무게에 깜짝 놀란 경험들은 다들 있을 것이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변화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전체 비율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플라스틱 빨대이지만 업체에서 나름 고민하여 종이 빨대로 바꾼 그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종이가 입술에 닿을 때마다 두유 맛인지 종이 맛인지 분간이 잘 안 가지만 그래도 감내하는 나 자신의 머리도 스스로 쓰다듬어 본다.
자연환경을 보호하자는 이 생각도 결국엔 내 새끼들을, 우리 후손들을 위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지 온전히 지구만을 100퍼센트 걱정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의도가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아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환경도 위한 것이고 사람도 위한 것이라고 애써 변명을 해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종이가 입술에 닿는 어색함도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익숙해질 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제라도 하나 둘 관심을 갖고 개선하여 지구가 좀 덜 아팠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