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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n 08. 2023

보랏빛 그녀

하루가 저물어간다.

이제 또 새 날이 테니

사흘 후면 그녀의 생일이 되는 건가.



그녀는... 내가 스물 넷이었나... 그 무렵 회사에서 만났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전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장을 구하자는 마음으로 들어간 캐피탈회사였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리드미컬한 소리가 날 정도로 타자가 빨랐던 나는 운 좋게 카드 서류의 약정을 입력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래, 운이 좋았다. 나 외의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채권 추심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말이 좋아 채권 추심이지 연체한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납입할 거냐, 연체가 길어지면 신용불량이 될 수 있다는 등의 고지인지 경고인지 모를 전화 통화를 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초보(?) 연체자들은 "00법 몇 조, 몇 항에 의거" 라는 말을 들먹이면 바짝 긴장해서 "네네, 바로 입금할게요."하고 납작 자세를 숙였지만, 3회차, 4회차 장기연체 하는 사람들은 배 째라 식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다음 날, 열심히 카드서류를 입력하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키가 크고 날씬하고 예쁘장하고 착해 보이는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했다. 자리는 비어 있던 내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됐고 직원에게 채무자 서류를 받고 업무와 관련하여 여러 사항들을 귀담아 듣는 모습이었다. 그녀도 나도 조금 낯가림이 있던지라 첫날은 데면데면 지내고 다음날이 되었는데... 왠지 이 여자분 목소리가 애기 같다.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던 나는 속으로 좀 걱정이 된다. 저렇게 애기 같은 목소리를 내면 연체자들이 얕잡아 볼 텐데... 강한 어조로 말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저렇게 애기 목소리로 앵앵거리면 연체대금 입금하려다가도 망설이겠네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를 탁 끊더니 그녀가 책상에 엎드린다. 그리고 운다. 일한 지 이틀 만에... 그곳이 그렇게 뭣 같은 곳이었다. 돈을 빌려가 써 놓고는 "돈이 없는데 어쩌냐."라는 식으로 나오면 도리가 없다. 다소 강경한 어조로 멘트를 해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애기같이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역이용하며 나이가 몇 살이냐, 너 애기냐, 그렇게 애기같은 애가 거기 왜 앉아 있냐부터 시작해 한 번 만나보자 라는 말까지 아주 삼단콤보를 날리기 일쑤이니 버텨낼 재간이 없다.



아직 이름밖에 모르는 그녀지만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를 해 주었다.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라고... 겨우 맘을 추스른 그녀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으며 민망하다는 듯 빙긋 웃어 보인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이 언니는 유독 보라색 아이템을 많이 하고 다녔다. 보라색 니트에 보라색이 약간 들어간 가방에 연보라색 티에 찐보라 핀에 보라색 수첩에 빨간 립스틱에 살짝 내비쳐 보이는 보랏빛까지, 그러고 보니 보랏빛 그녀였다.



"어~ 언니 혹시 보라색 좋아해요?"


"으응."


"나도 보라색 되게 좋아하는데~^^"


"응? 정말? 너한텐 보라색 물건은 잘 안 보이는데?"


"음. 난 갖고 있는 물건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보라색 좋아해요.

 언니는 시간 나면 뭐해요?"


"음. 나는 글 쓰는 거 좋아해~ 나중에 공모전에 글 내보려고 쓰고 있는 것도 있어.^^"


"와아~~ 나도 글 쓰는 거 좋아하는데~~

 음~~ 언니 혹시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해요?"


"엇~~ 좋아하지~~ 우리 노래방도 언제 같이 갈래?"


"앗~ 좋아요. 좀 있음 나 생일 돌아오는데 그날 갈까요?"


"응? 좀 있음 생일이야? 나도 6월이 생일인데."


"어~ 나도 6월인데, 언닌 6월 언제예요?"


"응~ 난 6월 12일이야."


"엥?? 진짜요?"


"응. 혹시 너도?"


"네~! 저도 12일이에요~!"


"헉.. 진짜?????"


"와~~~~~~!!!!"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하는 색이며 글 쓰는 것, 조용조용하며 소심한 성격인 것, 거기다 생일까지 모든 게 다 똑같았던 우린 너무 신이 났다. 만나면 하하 호호 너무나 재미있었다. 캐피탈의 지점장이 말도 안 되는 능력 밖의 것들을 지시하면 둘이서 같이 지점장 뒷담화도 하면서 서로 얼굴만 봐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세월이 흘러 언니가 결혼하고 언니 결혼식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부케를 받았다.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그냥 절친이라는 이유로 내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좀 지나 언니는 예쁜 아들을 낳고, 돌잔치를 했다. 당연히 나는 참석했고 얼마 후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언니가 아이를 안고 나의 결혼식에 와 주었다. 언니를 알고 거의 10년 지기가 되었을 무렵 난 결혼을 했고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서로에 대해선 각자의 신랑보다 더 많이 알게 된 우리였다. 가끔 그런 얘기도 했었다. 우리가 만일 성별이 달랐다면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모든 게 다 통했었다. 내가 언니에게 굳이 가타부타 풀어 얘기하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내 마음을 언니는 다 읽었다. 언니가 내게 전화해서 "란아... "하고 날 부르기만 해도 난 언니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단번에 아는 우린 소울메이트였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나니 서로 만날 시간이 너무 없었다. 사는 곳도 멀어서 한 번 만나려면 편도 1시간 30분의 차 시간을 감안해야 하니 만나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억척스럽게 만났다. 아이를 데리고 가서 식당에 가 앉으면 턱받이를 하고 앉혀 놓고 아이 입에 음식을 떠먹여주느라 흘린 거 닦아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정작 언니와 대화도 제대로 몇 마디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언니 얼굴만 보아도 좋았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도 좋아서 그런 정신없는 자리라도 난 꾸역꾸역 만나러 갔고 언니도 아이들을 데리고 꾸역꾸역 날 만나러 왔다.



"언니 우린 언제 맘 편하게 속 시원히 둘이서만 만나서 대화 실컷 해 봐?

 애들 데리고 대화하니까 도대체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


"ㅎㅎ 애들 뭐 크게 잘 못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좀 마음을 편케 가져.

 그리고 조금만 더 지나면 이제 우리, 애들 신랑한테 맡기고 너랑 나랑 둘이서만 만나자~ ^^"





그리고 얼마 후 한 밤중에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란아... 언니가 있잖아......"


"응? 뭐야~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아. 뭐야. 숨 넘어가겠네. 뭔데~ 빨랑 말 안 해?"


"언니 말야... 잘못되면... 어떡하지...? "


"아.. 진짜,,, 목적어 제대로 안 대? 이게 지금 글 쓰는 사람의 제대로 된 자세 맞아?"


"음.... 언니가... 자궁에 문제가 있대......"


"응? 무슨 문제...? 그러니까 아직 뭐 위험한 건 아닌 거지?"


"응... 아직은 아닌데... 지켜봐야 한다고... 그러네..."


"에이... 별것도 아니네~ 난 또 뭐라구~~! 지난번부터 별로 조짐이 안 좋다고 내가 언니한테 정기검진 잘 받으라 했어~~ 안 했어? "


" 아... 그게... 내 담당의사가 남자의사야... 너무 창피해... "


"아... 이 여자... 아직 덜 아프네. 정신 못 차리지? 남자면 뭐~! 언니가 처녀냐? 애까지 낳아놓고는 뭐가 창피하다고~!"


"아니... 그래두... 쫌 그래...."


"딴 말 말고 병원이나 잘 다녀~ 나중에 내가 병원 잘 다녔나, 안 다녔나 병원에 물어본다?"


"알았어.^^ 근데 란아. 나 되게 마음이 불안했는데 너랑 통화하니까 불안한 마음이 싹 사라졌어. ㅋㅋ"


"당연하지~~ 별 일이 아니니까~~~^^ 심심하거나 쓸데없는 생각  내가 가르쳐 준 핸드폰 게임 있지? 그거나 하고 놀아~ 알겠지?^^"




그렇게 언니는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끝냈는데, 언니 대신 내 표정은 굳어졌다.


뭔가 불길했다.


에이 괜찮을 거야. 아직 정확한 병명도 나오지 않았는데 뭘.





한 달쯤 지났을까...


형부한테서 연락이 왔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다고...


그렇게 수차례, 입원하고 퇴원하고를 반복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언니는 나날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어느 날은 긴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언니의 머릿결이 좀 거칠어 보였다. "요즘 머릿결 신경 안 써?"하고 타박하듯 말을 했더니 머리칼이 너무 빠져 가발이라고 했다. 내 말을 듣더니 좀 더 비싼 걸로 해야겠다는 농담도 했다.



퇴원하고 이제 괜찮은가 했는데 다시 또 연락이 왔다. 전이가 됐다고 했다. 폐로... 위로... 유방암까지... 젊은 사람이라 혈액 순환이 잘 되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차라리 나이가 많다면 혈액순환이 잘 안 이루어지니 따라서 암세포도 여기저기 잘 움직이지 않아서 의외로 빨리 치료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했다...


의사가 형부한테 마지막 상담을 했다고 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라고... 퇴원하셔도 된다고...




언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고,

거기서 만남이 언니와 마지막이다.




언니의 장례식.


울음이 한도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언니인데, 왜 그리 울음이 끊이지 않고 나왔는지...


엉엉 울었다.


아이들 조금만 더 크면 우리 둘만 만나서 즐겁게 놀자고 했잖아~!

이게 뭐야... 이렇게 빨리 가는 게 어딨어? 그럼 난 누구랑 놀아? 누구랑 얘기하고 누구랑 같이 웃고 지내냐구!!



이 좋은 세상을 그리 일찍 떠난 언니가 가엽고 애달파 우는 게 아니라 언니 없이 홀로 남겨진 내가 불쌍해서 우는 것 같은 이상한 울음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언니가 미웠다. 먼저 가버린 언니가...


아니... 차라리 잘 됐지... 항암치료 받으며 가끔 전화 와서는 먹기 싫다고,, 먹는 족족 다 토한다고... 투정하던 언니였는데... 아프기 전에도 마른 언니였는데 더 마르면 보기 싫다고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렇게 아팠던 언니였는데 안 아픈 곳으로 갔음 잘 된 거지...





개나리도 목련도 떠나간 걸 서운해 할 새도 없이 만물이 푸르고 싱그러운 6월이다.

1년 중 한가운데 든 6월이 되면

괜히 기쁠만도 한데

늘 언니가 그립다.





보고 싶다. 언니야...


언니는 예쁜 그 모습 그대로일 거고 난 무지하게 오래 살거라 호호할머니 모습일 텐데.


내 변한 모습에 놀라지 않고 나랑 잘 놀아줄 거지?


그때까지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알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언니가 쓰고 싶어 했던 글까지 내가 대신 마저 다 쓰고 그러고 갈게.


사랑한다. 언니야...


생일 축하해. 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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