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불냉면을 설명하는 괄호 안에는 물이 자작자작한 냉면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사진에는 양념만 얹어져 있을 뿐이라서 비냉 비슷하다 여기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매울 것이라고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맵다. 버젓이 냉면 이름 앞에 "불"이라고 정확한 힌트가 있었음에도 간과한 내 잘못이다. 아무리 쓰읍, 쓰읍 하고 방울뱀 소리를 내어봐도, 같이 보내온 달달한 식혜 음료를 마셔봐도 잠시 그때뿐, 매운 기운은 남아 나의 혀를 공격한다. 한마디로 진짜 미추어 버릴 것 같다.
위풍당당한 "불"냉면
배는 채워야겠고 이를 어쩐다.
둥둥 떠 있는 육수얼음덩어리가 조금씩 녹는 것 같다. 얼음이 녹으면 조금 매운 정도가 옅어질까? 아니, 문제는 얼음덩어리마저 빨갛다는 거다. 육수를 애초에 빨간 양념으로 만든 다음 얼린 것 같다. 이 얼음이 녹으면 녹을수록 육수의 매운 농도가 진해져만 가는 느낌이다. 아... 정신이 혼미하다. 살아야 한다.
벌떡 일어나 빈 그릇 하나를 가져왔다. 육수가 매운 거니까 면만 건져내기로 한다. 면에 묻은 육수 한 방울도 빼야 한다. 쭈욱 빠지라고 젓가락으로 조금 들고 있다가 빈 그릇으로 옮긴다. 이제 물기가 거의 없는 면만 그릇 가운데 모였다. 이제 좀 낫겠지 하고 한 입 물었는데 같이 따라 들어온 납작한 무에 당했다. 복병이 있을 줄이야. 아흑. 따쉬. 무가 그냥 무가 아니라 매운 양념을 몽땅 흡수한 매운 무다. 다시 또 쓰읍... 후후... 쓰읍... 후우... 눈물 찔끔, 콧물 훌쩍. 갑자기 서울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나 어릴 적 꼬꼬마였을 때
맵다고 찡찡거렸더니 김치를 물에 씻어준 우리 엄마.
라면 먹으며 뜨겁다 징징댔더니 라면에 찬물을 부어준 우리 엄마.
유레카~! 바로 물이야!
면이 담긴 그릇을 들고 정수기 물을 붓는다.
이제 이건 불냉면도 아니고 물냉면도 아닌 "넌 이름이 뭐니 냉면"이 되었다. 불냉면이 맹물에 빠졌다. 으흐흐흐. 맵칼한 맛과 향을 마음껏 뽐내던 불냉면이 불맛 나는 육수와 헤어져 볼품없어진 것도 모자라 맹물에 빠져있으니 아까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소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나저나
나 그렇게 맵찔이는 아닌데 이거 왜 이리 매운 거지?
사람에겐 매운 정도가 다 다른 거였다. 아마 냉면집 사장님 입장에서는 "이 정도의 맵기는 되어야 '불냉면'이라고 할 수 있지." 하는 기준이 있었을 터였다. 한데 그 기준은 내 입장에서는 최고 레벨 수준이었다.
매운 음식을 곧잘 먹는 나는 매운 닭발이나, 매운 떡볶이 등 내 입에 딱 맞는 맛있게 매운 음식을 흡입할 때, 맞은편에 앉아 매워 어쩔 줄 모르는 상대를 보고 웃으며 이게 뭐 그리 맵다고 호들갑이냐며 상대를 이해 못 한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 다른 것인데 무조건 내 기준에 맞춰 생각했다. 물을 넣으려고 하면 "원래 음식의 본연의 맛을 느껴야지, 물 넣으면 맛 없어져~"라며 심지어 물을 못 넣게 그릇 위를 손으로 막기까지 했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본인이 겪어야 매운 고통, 매운 아픔, 매운 슬픔을 아는 것일까.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온 나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반성하게 하는 날인가 보다. 반성하는 김에 서로 다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을 일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이해를 하려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옳다고 남에게 자신의 잣대를 강요하면 안 될 것이고
내가 생각했을 때 틀린 것이라고 다른 이의 생각을 지적하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는 영원히 옳은 것도 영원히 틀린 것도 없다.
찰나와 같은 인생에서 내가 알고 있는 옳음은 그저 내가 옳은 것이라 믿고 싶은 것일 뿐.
너무 매워 물을 자꾸 마셨더니 다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르다.
오늘 저녁은 먹지 말고 넘겨야겠다. 아! 모르지. 지금은 배 불러도 또 저녁 되면 배고파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