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Oct 20. 2022

여보. 우리 위장이혼할래?

저기요. 혹시 몸이 근질근질하세요?


저녁을 다 먹고 살짝 한가해질 때쯤.

각자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 나름 익숙해진 12년 차 부부인 우리는 보통 나는 작은 방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남편은 거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떨어져 있었던 시간 동안의 일들을 서로 대화를 하는 아주 다복하고 화목한 장면들을 자주 연출하고는 한다. 아! 연출이 아니라 사실이다. 어제 저녁도 TV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화목한 가정을 코스프레하듯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쩐 일로 아이들은 두고 남편이 내 쪽으로 오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여보. 우리 위장이혼할래?"

"뭐어??????????"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던 내 손은 일시정지가 되고 내 몸은 얼음이 되어 눈동자만 굴려 남편의 얼굴 쪽을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평소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사람인 내가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다시 말해 봐. 뭘 하자고???"

안 그래도 예쁘지 않은 내 얼굴이 오만 인상으로 더 일그러진다.


잠시 주춤하듯 하더니 남편은 그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라는 듯,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는 듯 온화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차근차근 설명한다.


......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이 LH에서 주관하는 국민임대아파트인데 요 근래 내가 벌어들인 소득이 제법 되기 때문에 일정소득이 초과하게 되면 우리가 이 집에서 쫓겨날 수가 있다. 그런데 만일 위장이혼을 하게 되면 따로따로 소득이 잡히기 때문에 여기서 쫓겨날 일은 없게 된다.라고 나름 정성껏 나에게 설명을 해준다.


그런다고 화가 누그러질까.

설명을 듣기는 들었고 이해는 되는 부분이고 충분히 수긍은 가지만 납득이 안 간다.


"그래서 지금 그 말이 맞다고? 그래서 지금 위장이혼을 하자고?"


말만 위장이혼이고 같이 사는 건 변함이 없다고 한다. 서류상으로 나만 떨어져 나오는 거라고 부연설명까지 한다. 말인지 방귀인지... 화라는 건 보통 시간이 지날수록 누그러지고 소멸되어야 정상이거늘 왜 이 대화는 하면 할수록, 남편이 나를 설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구마 100개를 먹고 물은 한 방울도 못 마신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인 건지.




남편은 결혼하고 1년 차에 결혼반지를 팔아버린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리 남편은 거의 남편계의 빌런으로 등극할 지경에 이르게 될 상황인데 평소 남편이 아주 못 됐느냐? 또 그런 건 아니다. 거의 남편계의 최수종이라고 불릴 만큼 혹은 남편계의 션이라 불릴 만큼 매우 가정적이고 친절하고 아내를 위하는 사람이다.

단! 매~~~ 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다를 뿐.


결혼하자마자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 첫 해는 에어컨이 없이 살았었다. 너무 더울 때는 베란다 문을 열고 현관문을 약간 열어두면 맞바람이 치는 것이 거의 태풍급이었다. 에어컨 없이 시작하기도 했고 굳이 살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아이를 낳게 되면서 갓난쟁이 있는 집 문을 열어 두기도 뭣하고 혹여나 아이 태열도 올라올까 걱정도 되어서 에어컨을 장만해야겠다 마음먹은 상황에 남편은 반지 이야기를 꺼냈었다. 평소 끼고 다니지도 않는데 이거 팔아서 에어컨을 사는데 보태는 게 어떠냐며...


그날 우리는 대판 싸웠다. (지금 12년 차에 부부싸움을 두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그날이 처음으로 한 부부싸움이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되었는데 결혼반지를 팔자니... 그건 거의 이혼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대사였다. 어르신들이 돌반지도 어지간해서는 안 파는 이유가 살짝 미신 느낌이 없진 않지만 아이에게 뭔가가 피해가 갈까 봐 팔지 않고 잘 보관하는 이유가 큰 데 결혼반지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반지를 예뻐서 갖고 있는다기보다 반지 그것은 하나의 증표인 것이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너와 나의 사랑 영원히 영원히 뭐 이런 느낌. 남편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인데 반해 나는 거의 극에 달하는 감성적인 사람이라 이야기의 합의는 결코 평화롭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사태 이후 지금 현재 어쨌든 에어컨은 있고 반지는 없다. ㅡ.ㅡ


그렇게 10년이 흘러 지금 내 앞에서 위장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남편이다.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가끔 정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자신의 보유재산을 숨기고 임대주택에 들어가서 온갖 편법을 이용하여 거의 공짜인 집에 살면서 간혹 삐까뻔쩍한 외제차 위에 요트까지 달고 철마다 놀러 다니는 꼴을 본 적도 있다. 법의 허술한 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잘만 살던데 우린 왜 단돈 몇 십만 원 차이 나는 걸로 여기서 쫓겨나야 하는 거냐고 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긴 하다.


하! 지! 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욕심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강할 때가 많다.

여자는 무엇보다 식욕을 못 참고 남자는 무엇보다 성욕을 못 참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개판 오 분 전 꼴이 날 것 같으니 결혼이란 제도를 만들어 너는 얘꺼~ 너는 쟤꺼~ 이렇게 짝을 짓고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 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결혼을 했다는 것은 증표이며 지켜야 할 의무인 것이거늘.


그런데 만일 위장이혼을 한다면 어떨까?

위장이혼도 이혼이다. 크게 보면 이혼이고 작게 봐도 이혼이다. 어쨌든 이혼이란 말이다. 서류상으로 남남. 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는 것이 가시지가 않는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난 장거리 연애를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그건 두 사람에게 모두 못할 짓이고 결국 이별로 가는 중간과정일 뿐이므로. 연애도 이럴진대 이혼 서류에 도장이라니. 차라리 그동안 우리 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더라면, 한 번 정도 이혼이란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너무 충격에 휩싸인 나를 보고 결국 씨알도 안 먹힐 것을 뒤늦게 파악한 남편은 다시는 위장이혼의 이응 자도 꺼내지 않기로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장이혼의 고민은 더 이상은 안 해도 된다.

위장이란 위장을 해야 하는 건데 나는 지금 이미 위장이 아닌, 글로 다 밝혀 버린 상태이니 말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해놓고 위장이혼을 한다면?


나는 남편과 나란히 철커덩 철커덩 ㅎㅎ 어머나~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ㅋㅋ




위장은 뭐니뭐니해도 카멜레온이죠. 검색해서 나온 카멜레온 밑에 샵 비열한 동물 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네? 자기야. 좀 비열하지 좀 말아 봐. 응? ^^





이전 19화 음악이 없다면 vs 책이 없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