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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23. 2022

힘을 내요. Super Power~!!

역할 바꾸기를 해 봅시다



사각, 사각, 사각, 
또각, 또각,

샥샥샥샥



이것은 어머님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가지를 가지런히 도마에 두고 한 땀 한 땀 칼질하는 어느 서 주부의 칼질 소리이다.  

칼질이 고요하게 울려 퍼지면서 대사가 흘러나온다. 


서주부야, 서주부.


응??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1시 방향으로 고개만 살짝 틀면 아일랜드 식탁에 도마를 두고 칼질하는 남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참 다소곳하게 칼질하는 모습이 단아하다. 그리고 그 어떤 남자들보다 멋져 보인다.

***

지난 여름 월요일부터 시작된 남편의 휴가는 장마와 코로나로 인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 채로 주욱 흘러 그 주 금요일이 되어 버렸다. 여행은커녕 하필 나는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어 잠도 줄여가며 거의 하루 24시간을 다 써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남편은 나 대신 주방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결혼한 아내들은 모두 느끼는 것이겠지만 남이 해준 밥은 참 맛있다. 음식을 하다 보면 간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이것저것 요리를 하다 보면 끼니가 되어 온전히 차린 식탁 이전에 냄새라는 냄새는 이미 다 맡아 버린 뒤이니 냄새에 질릴 만큼 질려버려 식욕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더라. 

그런데 요새는 식욕이 왕성해져 버렸다. 이유는 남이, 아니 남편이 해준 밥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남편이 뚝딱뚝딱 만들어 준 반찬은
호박전, 가지나물, 미역국, 김치볶음밥, 꽈리고추 멸치볶음, 소불고기, 양파장아찌, 부추전, 파전, 오이무침도 모자라 직접 만든 식빵으로 미국식 아침까지~

정말 먹을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레시피를 물어보면 

그냥 이것저것 넣었는데? 느낌 가는 대로~


와아~~~ 자긴 요리사를 해야 하나 봐~ 어떻게 이렇게 깊은 맛을 낼 수가 있어?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며 맛있는 한 끼를 뚝딱하고 하숙집에 사는 학생처럼 나는 또 정해진 내 자리 같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기를 근 5일째 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루 삼시 세끼를 오롯이 밥을 차려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돌밥"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니 말이다. 돌밥은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이란 뜻으로,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돌아섰더니 또 밥때가 되었다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남편은 휴가인데 하필 난 업무가 많으니 부부는 공동운명체이고 모자란 부분은 서로 채워주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 미안한 마음은 어마어마하게 들지만 난 노는 것이 아니고 졸려 죽겠어도 졸음을 참고 일을 하므로 덜 미안해하자 하는 마음을 갖지만 그래도 이거 참. 세뇌당한 유교사상은 남편이 반찬을 만드는데 어디 여자가 가만히 쳐 앉아서 지 해야 되는 일 한다고 그러고 앉아 있느냐 라는 말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농땡이가 아니라는 변명을 하자면,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의자에 쓸리게 되는 엉덩이 쪽은 작은 물집까지 잡혀 있는 상황이란 말이다. ㅠ.ㅠ 

마음속에 "유교사상이 가득한 나" 와 "현대 여성의 마인드가 꽉 찬 나" 가 열심히 싸우는 복잡한 심경 중에 
남편이 가지를 또각또각 썰면서 드디어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아주 서주부지, 서주부...


푸핫~

여태껏 말은 안 했어도 속으로 쌓인 걸까. 미안한 마음이 배가 된다. 

여보 어떡해... 이번 자기 휴가 때는 집에서 온통 주방일 한 기억밖에 안 남겠어...


대놓고 나의 잘못과 당신의 잘함을 끄집어내어 읊어준다. 


이제부터 서방님과 마누라의 대사가 바뀌기 시작한다. 

여보~ 반찬 만드느라 힘들지~ㅠ.ㅠ
자기 뭐 먹고 싶어?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까? 
아니면 지금은 저녁 먹을 거니까 내일이라도 뭐 사줄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뱉는 회심의 한마디 

자기 매번 밥 차리는 수고로움을 내가 한 끼는 해방시켜줄게~ 


라고 내가 말하고선 웃음이 터져버린다.

푸핫 ㅋㅋㅋㅋㅋㅋㅋ


어디서 많이 들었던 대사이다. 남편이 나에게 자주 했던 대사를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웃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진다. ㅋㅋㅋㅋㅋㅋㅋ



TV를 보면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헌날 싸우는 남편과 아내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하며 조언을 받으러 갈 때 전문상담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기억이 난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시는 게 가장 중요해요.
역할을 한 번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와우
우린 자연스레 일주일 동안 역할을 바꾸어 살았으니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건가~ 

ㅎㅎㅎㅎ
우찌 되었든 남편~ 고마워~
난 정말 다시 태어나도 당신 같은 사람은 또 못 만날 거 같아.


고맙고 
내 옆에 있어 줘서 
또 
고맙습니다. ^^



나 이번 일 얼른 끝나면 같이 이렇게 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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