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았다며 대대적으로 이야기를 하고는 친구와 만나서 놀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던 딸내미였다. 드디어 일요일 아침, 약속의 그날이 되었다. 딸아이는 시간이 어서 흘러 친구를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기만을 바랐지만 반대로 나는 약속이 취소되길 간절히 바랐다.
요새 같은 흉흉한 시대에 아이를 밖으로 내보낸다는 게, 그것도 보호자 없이 딸아이 혼자 보낸다는 게 영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각 지역마다 칼부림 예고가 올라오는 희한하고 무서운 요즘 아닌가. 마치 전쟁터에 총도 없이 아이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이불 밖은 위험해 라는 만화 같은 이야기로 아이를 잡아두고 집에 묶어둘 수만은 없었다.
"밖에 나가 친구 만나면 노는데만 정신 팔리지 말고 주변에 이상한 사람 보인다 싶음 잘 피해 다녀. 엄마한테 두 시간 간격으로 문자도 좀 하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함흥차사인 딸아이가 걱정되어 한 마디 했더니 "친구랑 놀다가 문자 하는 걸 까먹을 것 같은데?"라고 한다. 그래서 아예 시간을 콕 집어 "1시, 3시에 톡 보내면 되잖아." 말해 주고 아이를 현관에서 배웅했다.
시간이 흘러 1시 정각.
카톡 알림이 울린다.
열어봤더니 딸아이의 간단하고 단출한 한마디
나 살아이써요
하하.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안심이 되면서도 참 씁쓸한 대사다.
장난 삼아 맞춤법도 틀리게 써서 딴엔 재미있게 보낸다고 보낸 것인데도 이면의 착잡함은 가시지 않았다. 진정으로 무탈하게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목적의 문자라니...
식사하셨어요? 라는 말은 정말 식사를 했는지 묻는 질문이 아니라 안녕하셨냐는 안부의 다른 말인 것처럼 잘 살고 있냐, 난 잘 살고 있다의 의미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생존신고이니 말이다.
2017년 9월, 친구집에 놀러 간 딸아이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던 사건의 주범인 이영학이 하필 이 타이밍에 생생히 떠오른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친구네 놀러 가겠다 해서 허락해 주었을 뿐인데 어처구니없는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그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 사건에 너무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즈음 불안감이 극에 달해 친구 집으로 내 아이를 절대로 보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런 사건이 있기 전에도 위험을 늘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나는 아이에겐 이것도 위험하고 저것도 위험하니 가급적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삶을 살아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공주가 위험할 수 있으니 물레를 모두 찾아 없애버린 왕과 왕비처럼.
몇 년이 흘러 이영학 사건도 점차 잊혀 갔다.
망각으로 힘을 얻기도 했고, 또 언제까지 아이를 끼고 살 수만은 없다 싶어 이제는 아이들 외출도 허락하려 맘을 먹으려던 차였는데 살인 예고 기사가 뉴스에 가득 찼다.
언제부터 갑자기 이 나라가 이렇게도 흉흉해진 걸까.
총기소지 불법에 치안 강국인 대한민국이라 자부심을 느낀 나였는데...
핸드폰 따위는 없던 나 어릴 적엔 친구들과 함께 해 질 녘까지 동네 구석구석을 뛰어놀아도 전혀 문제라곤 없었는데 말이다. 세월이 흘러 혹여 이상한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불안함을 늘 안고 살아야 할 아이들이 참 안타깝고 가엽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자꾸만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자신만 불행할 수는 없다며 타인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만 간다.
3시가 되니 카톡 알림이 또 정확하게 울린다. 딸아이다.
지금도 살아이써요~
5시쯤 귀가한 딸에게 물었다.
"엄마가 1시, 3시에 문자 보내달라고 얘기한 걸 어쩜 그렇게 알람 맞춰 놓은 것처럼 정확하게 시간 맞춰 톡을 보낼 수가 있어?"
그랬더니 딸아이가 하는 말.
"으응~ 잊어먹을까 봐 1시랑 3시에 알람 맞춰 놨지~"
아이고~ 그랬구나. 내 새끼~ ^^
2023. 8월 6일 일요일
일전에 위험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순두부처럼 너무 여려 걱정이 되었던지 한 작가님께서 "황금별" 노래를 들어보라며 댓글로 선물해 주신 적이 있었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구속하기보단 아픔을 감수하고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는 가사였는데 인생에 있어 위험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에둘러 알려주시려 한 것 같다. 더 넓고 큰 세상을 마주할 아이를 언제까지나 품에 안고 모든 위험을 내가 다 막아 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그 위험이라는 건 수긍이 가고 납득할 만한 위험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23년 8월 6일 일요일, 칼부림 사고가 빈번하던 여름날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