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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Sep 28. 2023

환장할 노릇

평소 두뇌훈련을 안 하면 갑갑함이 자주 옵니다


오늘 홈플러스에에에... 

의 소리 크기가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나는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가 그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잠시 손을 멈췄다. 왕년에 분당 1천 타까지 기록했던 전적이 있던 터라 흡사 키보드워리어가 키보드를 잡아먹을 듯이 두들겨 패대면 혹여나 남편이 하는 말을 못 들을까 싶어 잠시 바쁜 열 손가락을 허공으로 올리고 얼음땡 놀이 중 얼음인 척하는 중인데 기다리는 그다음 말이 감감무소식이다. 

약 7초가 흘렀나. 멈춰 있던 손가락이 얼른 키보드로 내려오고 싶은지 꿈지럭꿈지럭거린다. 지루하다. 하던 일까지 모두 멈추고 귓구멍을 최대한으로 열어 거실을 향해 쫑긋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 뒤의 말을 안 하는 남편 때문에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지금 문장이 다 끝난 거여, 뭐여?


음... 홈플러스에...


문장 끝이 지금 마침표여, 쉼표여?


내 뒤 의자에 앉아 양치를 하던 딸아이가 양치하다 말고 풉 웃었다. 내 대사와 말투가 웃겼나 보다. 


겨우 겨우 쥐어 짜내어 말을 이어하는 남편. 

딸아이를 부르더니 묻는다. 


선택을 잘했다는 걸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 


그냥 선택을 잘했다고 하면 되지, 뭐가 고민이야. 아빠는 참. 


음... 그걸 다른 말로 뭐라 하잖아. 그게 뭐지?


알듯 말 듯, 입에서 나올 듯 말 듯 머리에서 맴돌기만 할 때 얼마나 답답하고 갑갑하고 머리 뚜껑을 열고 싶던가. 명색이 나도 심심할 때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 단어와 친한 편이니 답답증을 해결해 주고자 머리를 좌삼삼 우삼삼 굴려본다. 


직접적으로 생각이 안 날 때는 반대말을 떠올려보면 좀 수월한데 뭐지, 미스 초이스? 매번 콩글리쉬만 잘하면서 왜 지금 영어로밖에 생각이 안 나는지. 미스 초이스의 반대말은 베스트 초이스? 줄여서 베초? 베싸메 무초?

내 의식의 흐름을 가만히 듣고 있던 딸아이가 또 큭큭거리며 웃었다. 둘이서 또 한바탕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오늘은 일주일 전부터 계획한 재래시장 나들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명절이 뭐가 중요하냐 하시는 어머님께서 이번 추석 때는 가족여행이나 다녀오라며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하셨고 서울 친정엔 추석 당일날 하루 다녀오기로 했으니 긴 연휴 동안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장이라도 가서 사람 사는 구경이나 하고 먹거리나 잔뜩 좀 사 올까 해서 10킬로쯤 떨어진 재래시장에 갔는데 믿었던 주차장 초입에 경찰 두세 명이 교통정리를 하며 아예 못 들어간다는 말을 했다. 


주차할 곳이 없어 오늘 계획은 다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시장 나들이는 다음으로 미루고 밖에 나온 김에 식당에 들러서 밥이나 한 끼 먹고 들어가자고 결정을 내렸는데, 검색하는 식당마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다 휴무였다. 6일간의 긴 연휴 동안 식당일 하는 사람들도 고향도 가고 쉬기도 해야지 너무 우리 생각만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외출한 보람이 하나도 없어 아쉽던 차에 옆에 커다란 홈플러스 건물이 보였다. 


남편도 그냥 집에 들어가긴 아쉬웠던지 홈플러스 푸드코트라도 갈까? 묻길래 그러자고 하고선 들어가 마침 새로 생긴 샤부샤부 식당에 들어가 마라맛, 얼큰한 맛으로 반반샤부샤부를 배 터지게 먹고 나와 간식도 또 사 먹고, 저녁에 먹을 초밥, 닭발도 사고, 내일 아침 먹을 구충제도 사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같이 보내고 나서 내뱉은 남편의 말이


오늘 홈플러스에에에...


였으니 무슨 말을 할는지 더욱 궁금했었다. 


결국 남편이 갑작스럽게 낸 퀴즈를 우리 셋 중 아무도 맞추지 못하고 30분쯤 흘렀나.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는데 남편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날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신의 한 수!"


아~ 하하하하


잘 내린 결정과 뜻은 맞지만 전혀 생각해 낼 수 없던 말이다. 

그리고 30분 내내 기억이 안 나서 끙끙대다 번개 맞듯 갑자기 떠올라 머리가 상쾌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또 웃음이 터졌다. 


그러네. 오늘, 평소에 잘 가지도 않던 홈플러스를 간 게 신의 한 수였구나.



잠시 후 막둥이가 아빠한테 대화를 시도한다. 


아빠는 친구한테 어어...


응? 뭐. 


음... 내가 뭐라고 할라 그랬지...



너도 한 30분 주랴? 





<설단 현상>을 아시나요?


긁힌 자국이 있는 프라이팬으로 요리하는 사람에게 발암물질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항암물질이 나올 수 있다고 잘못 말한 지인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다. 길을 잘 걷다가도 행여 싱크홀에 빠질까 봐, 난 안전 운전하는데 마주 오는 차가 날 들이받을까 봐, 빈둥빈둥 누워서는 혹시 천장이 무너질까 봐 노심초사 걱정을 붙들고 사는 날 보며 한 지인은 내게 왜 그리 불안증이 심하냐 말해야 하는 걸, 넌 너무 "안전불감증"이야 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한 적도 있다. 


하려던 말 대신 헷갈리는 말이 먼저 나온 실수일 것이다. 


설단 현상과는 다르다. 

설단 현상(舌端現象, "Tip of the tongue" phenomenon)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이나 대상에 대해 설명을 요구받았을 때, 이를 연상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흔히 "말이 나올 듯 말 듯 혀 끝에 맴돈다(on [at] the tip of one's tongue)"고 하여 '설단(혀 끝)' 현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TV나 영화를 볼 때 어떤 연예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 그 연예인이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 이름을 접하거나, 그 연예인 이름을 구성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연예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것이 그 예이다. 불완전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것이므로, 아예 기억나지 않는 건망증과는 다르다. --설단 현상 개념. 나무위키 참고


*Pixabay로부터 입수한 愚木混株 Cdd20님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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