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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y 25. 2024

망사바지를 입는 남편

당신...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남편은 자린고비다.

아니다. 다른 사람(주로 가족)에게는 아낌없이 쓰는데 유독 자신에게만 짜다. 그나마 다행으로 알아야 하는 걸까.

한 계절에 옷 두 벌로 나니 말 다 했다. 그냥 패션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한 남자의 의복이 변변치 않으면 당신이 욕을 먹는 게 아니라 와이프인 내가 욕을 먹는 거라고 귓구멍에 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지 외면은 중요하지 않다나? 물론 맞는 말이다. 그래도 중간은 가자 응? 이거 뭐 와이프 욕 먹이기 프로젝트 중인가?


외출복도 두 벌로 땡인데 실내복이라고 뭐 다르겠나. 더하면 더 했지.

따땃한 날이 지속되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남편은 무릎길이의 반바지를 즐겨 입는다. 그 문제의 바지는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입었던 옷이다. 브랜드 옷도 아닌 보세옷이니 몇 년간 입었으면 이젠 그만 입고 보내주어도 되련만 그의 사전에는 이만하면 되었다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결국 면소재 반바지의 허리를 굳건히 잡아주었던 널따랗고 흰 고무줄은 명을 다하고 말았다. 힘이 없으니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는 가뿐히 팬티의 허리라인을 보여주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인싸들만 코디한다는 팬티라인 살짝 보여주기를 따라 하는 형국이다. 아니 그걸 왜 자기가 그러고 있냐고...


출처. 인스티즈 (이런 패션은 캘빈클라인 정도는  입고 하는 거 아니뉘, 응? 왜 펄렁이는 사각팬티를 입고 그러는 거뉘?)


허리춤에 팬티 허리라인이 까꿍 고개를 내민 걸 본 딸내미는

"아빠~ 팬티가 다 보여! ㅋㅋㅋㅋ"

라고 말하며 끝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다 싶어 나도 옆에서 같이 면박을 주었다.


"으휴. 좀 버려라. 응?"


하지만 여기에 굴할 남편이 아니지. 작은 방으로 슬쩍 들어가더니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입고 나왔다.

늘어난 흰 고무줄을 앞 정가운데로 당겨 묶고 그 묶은 매듭이 풀어지지 말라고 올림머리에 쓰는 나의 크고 동그란 헤어핀으로 고무줄을 꽉 집어 준 것이다. 그리곤


"어때~?"


하고 패션쇼장의 패션모델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에그머니 세상에

그 모습은 마치 힘 빠진 중요부위가 밖으로 나와 있는 형국이었다. 하필 정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니. (나만 음란마귀인가.)



가만히 있기 뭐해서

"그게 뭐야!"


하고 소리를 쳤지만 역시나 마누라의 외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그.


하아...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말지. 상대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안 보는 게 답이다.


어제 그 난리부르스를 치고 하루를 넘겼는데 퇴근하고 온 남편은 또 그 문제의 바지를 주워 입었다.

아차차. 집에 오기 전에 냉큼 버렸어야 했는데 딸내미와 병원 들렀다 오느라 한 발 늦고 말았다.


이번엔 다른 전략이다. 나는 남편에게 통사정을 했다.

"제발 좀 하나 새로 사. 응?

 그것 좀 제발 버리자~ 응?"


"이걸 왜 버려~"

그러더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딴엔 신경이 쓰였는지 바지를 벗고는 자신의 눈앞에까지 들어 올려 펼쳐 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뭔가 깨달음의 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망사인데???"


"응??"


하고 돌아보았는데 코 앞으로 든 바지의 건너편 남편의 얼굴이 바지를 관통해 내 쪽에서 비쳐 보인다. 천장의 조명이 가까워진 탓이다.


푸하하하하하하하


"그게 뭐야!!

내 허락도 없이 남정네가 어딜 시스루를 입고 다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처. KBS (고수도 이런 흑역사가... 그래도 윗도리니 다행, 왜 당신은 아랫도리를 ㅠ)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 쳐다본 나는 얼마나 웃겼는지 입에선 주전자 끓는 소리가 나왔고 내 이상한 웃음소리를 듣고는 남편의 입에서도 주전자물이 끓어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나왔다. 한 번 터져버린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증기를 내뱉었고 남편은 얼굴이 찡그려질 때까지 증기를 내뿜고 또 내뿜었다. 이거 망사야 망사 소리를 연신 외쳐대니 웃음은 도대체가 멈추질 않았다. 와... 얼마나 입어야 팬티도 아니고 바지가 해질 정도가 되냐... 큭크크큭 웃는데 온몸에 땀이 빠짝 날 정도로 웃음이 터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자 씁씁 후후 씁씁 후후 호흡을 정돈하며 살기 위해서 숨을 쉬려 노력했다. 겨우 안정이 됐다 싶어 남편을 힐끗 돌아보는데 또 바지를 올려 얼굴 앞에 대고 바지를 관통해 날 쳐다보며 큭큭 거리며 웃는다. 그리고 또 또 내뱉는다. 망사야 망사~


아놔, 오줌까지 지리겠네. 저 냥반 확 마 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걸로 자존심 상해서 웃기 싫었는데 참으니까 이런 얼굴이...




하아... 숨을 못 쉴 정도로 한참을 웃다 죽은 아이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딱 이런 상황이었구나.

달밤에 서로 얼굴 쳐다보며 웃다가 숨 못 쉬어 죽을 뻔했다.


내일은 세상이 두 쪽 나도 저 바지를 내가 꼭 내다 버릴 거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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