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Jun 20. 2024

밥 차려! vs 돈 벌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뭐 이런 그...


출처. 블로그 은의 시 선



밥 차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급하게 조선시대로 내가 시간이동을 한 줄 알았다. 차라리 정말로 시간이동을 해서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에 저녁을 앞둔 시공간에 내가 있었다면 이해가 더 쉬웠을 것 같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당연하게도 난 우리 집 거실에 그대로 있었다. 2024년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그것도 느낌표를 반드시 표기해야 할 정도의 말의 세기를 담은 3음절을 듣고 있자니 그야말로 현타가 왔다.


난... 밥을 차리려고 결혼한 건가.


평소에도 한결같이 무뚝뚝한 남편이라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 수월할 텐데 평소엔 전혀 보수적인 면모가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다정한 쪽에 가까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속이 답답해져 오기까지 한다. 이 인간 낮에 뭘 잘못 먹었나? 아니지, 맛있는 점심 자알 먹고 소화가 다 되어 배가 출출하니 그런 말을 했겠지. 그래도 그렇지 퇴근하고 현관문 열어 마누라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다짜고짜 "밥 차려!" 라니! 경상도 지방의 아버지 뻘 되는 남자들이 저녁에 집에 와 아내한테 "밥 묵자, 아는? 자자." 딱 이 세 마디만 한다던데 그게 멋있어 보여서 그걸 따라 하는 건가? 그래도 그건 명령형이 아닌 청유형과 의문형이네.


명령하는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땐 속이 뒤집어 지다가 곧이어 허탈, 허무까지 느껴지니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봤음직한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같이 있는데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 될 일이라는 이성의 끈을 겨우 잡고서 다툼 대신 눈이 찢어질 듯이 잔뜩 눈을 흘기는 것으로 대신하고 꾹 참았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을 다 먹고 치우고 거실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출출했던 배가 포만감이 느껴지는지 남편의 표정은 온화해졌다. 난 진작부터 말하고 싶었으나 기분을 누그러뜨린 후 하려고 참았던 말을 꺼냈다.  


"어떻게 밥 차려!라고 나한테 명령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자기 종이야? 하인이야?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같은 말이라도 '밥 먹자'라든가, '저녁 먹을까?' 하고 좋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거 아녔어? 입장을 바꿔서 내가 자기한테 '돈 벌어!'라고 명령하면 어떨 것 같아? 자기 막 기분이 좋아서 하늘을 날 것 같겠어? 아니잖아. 벌써 기분 나쁘잖아. 그렇지?"


평소 같으면 뭐라고 대거리를 할 사람인데 내 말이 백 번 맞는지 아무 대꾸도 없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남편의 궁색한 표정을 보니 답답하던 내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잔소리는 길면 길수록 효과가 없다. 간단명료하게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나 아까, 속 많이 상했어.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지?"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내 놓으니 훨씬 개운해졌다.

5분이 채 흘렀을까?


남편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건넨다.


"여보, 여봉. 나 복쭝아~ 쭈박 쭈박~~ 주떼요~~ (번역: 여보, 우리 복숭아나 수박 먹자)"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딸이 한 소리 한다.


"허얼... 아빠가 유아퇴행이 시작됐나 봐."


다들 어이없음에 입을 벌리고 우리 집에서 덩치가 제일 큰 인간을 쳐다봤다. 그렇게 '밥 차려! 사건'은 일단락된 듯했다.




다 먹은 과일 접시와 포크, 과도를 들고 일어나 싱크대로 갔다. 설거지대야에 담아 두었던 물컵도 같이 마무리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더위를 많이 타는데도 주방 전용 선풍기를 켜는 걸 늘 깜빡하고 고무장갑부터 끼고 보는 나다. 응? 근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에어컨도 켜지 않았는데.


손을 이미 고무장갑 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으니 더워도 선풍기 켜는 걸 포기한 아내를 배려해 거실 끝 소파에 앉아 선풍기 리모컨으로 전원을 누르고, 바람 세기를 정하고, 회전시켜 아내에게 방향을 맞춘 후 고정하는 남편의 예쁜 짓이다.


잠시 마초스러움을 보여주려 했던 건지, 남자는 하늘이라는 걸 내게 인식시켜 주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더운 여름 집안일을 하는 아내를 흘려보지 않고 자신의 눈에 담았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샘솟는다.


부디 그 배려 오래오래 유지해 주길 당부드리오~ ^^



출처. freepik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